방정환 연구 서론
-도쿄 시대를 중심으로 (靑丘學術論集 14호, 1999.4)

나까무라 오사무 (仲村 修)

처음

이 글은 조선 아동문화·아동문학의 선구자 방정환(1899∼1931)의 참모습을 바로 세우는 데 기본이 되는 문제만 살펴보았다. 깊이 있는 연구는 뒤로 미룬다.
  방정환(대표적인 호는 소파)은 아쉽게도 33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활동 시기는 3·1운동 바로 뒤부터 계산하면 13년으로, 짧긴 하지만 아동문화운동(소년운동), 아동문학, 저널리즘의 넓은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따라서 그 전체 모습을 살피려면 여러 면에 걸친 논문이 필요하다. 
  이 논문에서 다루는 시기는 방정환의 활동 초기 시기로서, 3·1운동 직후에서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도쿄를 떠나기까지 4년간이다. 이 초기 시대는 그 후 왕성한 활동기와  함께 중요한 시기이다. 왜냐하면 이후 방정환 활동의 기본이 되는 요소가 이 시기에 거의 집약적으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또한 독립운동을 꿈꾼 웅변가이면서 문학을 사랑한 한 청년이 소년운동가·아동문학가로 크게 성장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방정환은 '어린이'라는 말과 '어린이날'을 만들어 일제 하에서 하기 힘든 소년운동을 이끌고, 근대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 편집하고, 조선 초의 아동문화연구단체 '색동회'를 만들고,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연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근대 조선의 아동문화·아동문학의 발전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에서 방정환의 연구는 구전에 의한 개인사 연구, 소년 운동의 부분적 연구, 친구·지인·후배의 인상기라는 측면이 강하고, 시대 배경까지 파악해 내려는 실증적이고 입체적인 동시에 종합적인 연구는 많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참모습'에 이르기 위해서는 약간의 거리가 있었다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아동문화, 아동문학운동이 독립운동의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영웅화되는 면도 없지 않다.
   게다가 도쿄시대에 당연히 받아들였을, 일본아동문학에 대한 연구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의 상황에서 구미 제국이 아니라 일본 밖에 영향을 받을 곳이 없었던 시대적 제약성은 있지만 그가 일본 아동문학(혹은 일본이 수용하고 있던 구미 아동 문학)에서 무엇을 어느 정도 받아 들였는지 밝히는 게 그의 업적을 손상시키는 일이 되진 않으리라. 오히려 시대 안에서 그의 독자성을 깊게 이해하고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이 논문에서는 주로 논의가 되어 왔던 기본문제를 중심으로 얘기해 나가려 한다.

1장 아동문화운동의 동기와 시작 시기

1.'천도교청년회'의 신문화운동

조선에서 아동문화운동은 소년운동이라는 모습을 띠고 1919년 3·1운동 이후에 전개되었다. 중심이 된 데는 '천도교 교리강연부'이다. 이 교리강연부는 3·1운동의 실패 이후 민족역량의 배양과 계몽을 목적으로 천도교의 젊은 지도층에 의해 1919년 9월 2일에 조직되었고, 전국 지부 결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주요 구성원으로는 이돈화(李敦化), 정도준 (鄭道俊), 박래홍(朴來弘), 김옥빈(金玉斌), 이두성(李斗星), 신태련(申泰練) 등이 있었다.
   이 교리강연부는 1920년 3월에 '도쿄 청년회'로 이름을 바꾸고, 포덕부(布德部). 편집부(編集部), 지덕부(지덕부), 음악부(음악부), 실업부(실업부)등을 두었다. 그리고 편집부 사업으로 이름높은 월간 종합잡지《개벽》을 이두성 발행, 이돈화 편집으로 1920년 6월에 창간했다. 체육부에서는 체육 운동의 한 활동으로 야구팀을 만들어 전국에 야구를 보급했다. 나중에는 덴마크 체조를 받아들여 교도들에게 날마다 5분간 운동을 시키기도 했다.
   다음해 1921년 4월 청년회 안에 소년부를 두고 한 달 후에는 '천도교 소년회'로 독립했다. 소년부와 소년회 창설은 김기전(金起田), 방정환의 발기에 의해 이루어졌다.
   또한 청년회는 다음 해 1922년 6월에 월간잡지 《부인》(발행인 김옥빈)을 창간하고1923년 3월에는 아동잡지 《어린이》(편집 겸 발행인 김옥빈)를, 1925년 12월에는 《조선농민》(편집 겸 발행인 이돈화)도 발간하여 사회 각층으로 신문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청년회는 짜임새 있는 체제를 갖추기 위해 1923년 9월 2일에 '천도교 청년당'으로 바꾸었다. 발의는 이돈화, 김기전, 조기간, 박사직(朴思稷), 박래홍 등이었다.

2.'천도교소년회'의 발족

천도교소년회는 1921년 5월 1일 정식으로 발족했다. 발족 당시 모습은 《개벽》지에 다음과 같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활동 내용을 알 수 있는 부분을 아래에 인용하겠다.
   '천도교소년회'는 올해 5월 1일에 천도교회 소년을 중심으로 도시 소년들의 발기에 의한 것이고 회원이 되는 자격은 만 7세에서 16세의 남녀소년으로 하는데 현재 회원 수는 370여명이고, 발기당시 회원 수에 비해 약 3배로 증가했다 하고 현재도 날마다 신입회원이 있다고 한다.
   이 회의 규약 2조를 보면 "본 회는 회원의 덕성을 닦고 견문을 넓히고 신체의 발전을 꾀하고 쾌활 건강한 소년을 만들 것을 목적으로 한다."로 되어 있고, 규약 9조를 보면 "이 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유락부(遊樂部)와 담론부(談論部)와 학습부(學習部)와 위열부(慰悅部)의 네 부를 두되 유락부에서는 유희와 운동을 행하며, 담론부에서는 담화와 강론을 행하며, 학습부에서는 사회 각 방면에 실제를 학습하며, 위열부에서는 회원과 회원 아닌 사람 사이임을 묻지 않고 때와 경우 상응한 위문과 경하(경하)를 행한다."고 되어 있어 이것으로 이 회의 목적과 사업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이 회의 사업내용을 자세히 다 말할 순 없지만 소년들의 활동 중에서 의미 있는 몇 가지를 살펴보면,

(一)회원 상호간에 서로 경어를 사용하여 애경(愛敬)을 주(主)하는 일  
  (二)회원 상호간의 우의를 심히 존중하여 질병이거든 반드시 상문하고 경사이거든 반드시 상하(相賀)하되 그 중에 혹 불행한 동무가 있거든 추도회 같은 일까지를 설행하여 소년의 인격 자중심(自重心)을 기르는 일
  (三)일요일이나 기타 휴일에는 반드시 단체로 명승고적을 심방하여 그 심지(心志)를 고상순결케 하는 일
  (四)매 주간에 2차의 집합(集合)을 행하여 사회적 시련(試鍊)을 게을리 아니 하는 것 등이다.

 그리고 이 회의 설립과 운동은 서울과 지방을 불문하고 소년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
전보나 서신으로 이 회의 진행 방법을 묻고 연락을 취하려고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소년부·소년회를 발의한 김기전과 방정환은 어떤 생각에서 어떤 계기로 이런 일을 시작한 걸까?
   3·1운동 이후부터 소년회 창설까지 소년운동에 관련된 두 사람의 주장을 각 종 잡지에서 살펴보자.
   김기전[호는 소춘(小春)]은 1920년 7월 《개벽》지의 '장유유서의 미폐(未弊)-유년남녀의 해방을 제창함'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요약히 말하면 제일 유년도 역시 사람이다. 이천만 형제 중위 일인이며 아니 세계 십육억 만인 중의 일 인이며 장래의 큰 운명을 개척할 일꾼의 일 인이라 하여 그의 인격을 인(認)할 것이외다. 그리하여 그와 더불어 아무쪼록 제회(際會) 장유(長幼)간에 열리는 따스한 새 길을 짓도록 할 것이외다. 이러한 정신을 장자(長者)된 우리가 各히(각기)소유하면 장유유서의 말폐로 기(起)한 현하의 제반 악습을 개(改)하게 될 것이며, 반도의 수백만 어린 남녀는 잉습(仍習)의 무서운 갱참(坑塹)으로서 해방될 것이외다. 근일 여지 해방론이 성행함에 불구하고 아동해방론이 전하지 못하였나이까.

 천도교에서 으뜸가는 이론가이고 정치, 사회문제, 문화론, 민족 문제에 걸쳐 다방면으로 논쟁을 펼쳤던 김기전은 위 글처럼 아동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논지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같은 시기 방정환의 평론, 논설, 작품 등을 각종 잡지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작품이 게재되어 있다.

 ·물망초, 〈소녀가 가는 길〉(소설), 《신여자》창간호, 1920년 4월
    ·잔물, 〈나의 시〉《천도교회월보》116호, 1920년 4월
    ·소파, 〈애(愛)의 부활〉(소설),《천도교회월보》117호, 1920년 5월
    ·잔물, 〈어머님〉《개벽》창간호, 1920년 6월
    ·잔물, 〈원산 갈마반도에서〉(시),《개벽》2호, 1920년 7월
    ·방정환, (어린이 노래) 〈불켜는 이〉(번역시),《개벽》3호, 1920년 8월

물망초, 잔물, 소파는 전부 그의 호로 알려져 있다. 이상의 6편에서 소년운동에 관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소년시 〈불켜는 이〉한 편이 겨우 소년운동과 관련되었다. 결국 이들 작품에는 최남선의〈청춘〉을 애독하고 같은 잡지에 수필이나 시를 투고하는 문학청년 방정환의 모습은 있어도 소년운동가로서 방정환의 모습은 볼 수 없다.
   다음에 그가 한 강연 활동을 동아일보에서 살펴보자.

 ·탐정소설 팔일삼(八一三) : 보전친목회 주최 문예회, 1920년 6월 13일 오후 1시 보성법률     전문학교 안에서
   ·자아 각성과 청년의 단합(보전친목회 초대 강연회) : (보전 친목회 문예부장)
    평양청년회 주최, 1920년 6월 (일시 불명)
   ·개벽 선언 : 천도교 청년회 문천지부 주최 특별강연회, 1920년 6월 30일 오후 7시
    천도교구실 안에서
   ·세계평화는 인내천주의 : 천도교 청년회 주최, 1920년 7월 2일 오후 7시
    원산 동락좌에서   
   ·자녀를 해방하라 : 조선학생대회 강연단(현금시세와 정신의 개조), 1920년 7월 28일
    8시 반 시립송도보통학교 기도실에서-고려청년회, 동아일보 개성지국 후원
    *경시청 외에 다수 경찰관 감시 때문에 '자녀를 해방하라'로 변경
   ·노력하라 : 조선학생대회 강연단, 1920년 7월 30일 평양 남산현 예배당에서
   ·생활 개조와 아동문제 : 천도교 소년회 환등 강연회, 1922년 12월 25일 오후 7시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강연 내용이 명확하지 않아서 단언할 수 없지만 강연 제목으로 추리하면 그가 소년 문제를 직접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7월 28일 '자녀를 해방하라'부터인 것을 알 수 있다.
   위 내용을 살펴보면 천도교도였던 방정환은 간부 15명을 잃은 3·1운동 직후부터 소년운동을 이끈 것은 아니다. 천도교의 재기를 짊어진 천도교도로서 교리강연부 행동방침 구축을 궁리하던 중에 서서히 소년운동을 선택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즈음 김기전의 존재는 방정환에게 커다란 정신적 지주였을 것이다. 그 때가 '자녀를 해방하라'의 강연을 한 1920년 6,7월쯤 된다.
   방정환의 장남 방운용은 "교주와 많은 지도층 간부를 잃고 민족 운동 재건을 모색하던 교회의 총의가 청년운동과 농민운동으로 꾀어갈 때, 아버님과 몇몇 동지들은 먼 앞날을 전망하고 소년운동을 극구 주장했으나 일방적으로 무시당한 채 토오꼬오로 유학했다"고 말한다.  이 말은 근거가 미약하여 설득력이 약하지만 위에서 얘기한 내용을 뒷받침해 주는 실마리는 되지 않을까 싶다.
   다음 해 소년부, 소년회의 정식 성립은 대회적으로도 중요한 의의를 가지지만 교회 내부에서도 방정환들의 끈기 있는 설득으로 교리강연부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에서도 인정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또 개인적으로는 가난하게 지낸 소년시기가 그를 소년운동으로 향하게 하는 내적 동기가 되었다. 방정환은 후에 1922년 6월에 개벽사에서 발행된 번안 동화집 《사랑의 선물》의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학대받고 짓밟히고, 차고 어두운 속에서 우리처럼 또 자라는 불쌍한 영(靈)을 위하여 그윽히 동정하고 아끼는 사랑의 첫 선물로 나는 이 책을 짰습니다.
                                                              -신유년 말에 일본 동경백산 기슭에서 소파

 이 서문에 있는 것처럼 방정환의 눈에 비친 조선 아이들의 모습은 어린 날 그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였다.

2장 아동문학운동의 동기와 시작 시기

1.아동문학작품 번역의 시작

 방정환은 언제부터 외국 아동문학 작품의 번역을 시작한 것일까? 본격적으로 출판된 번안동화집 《사랑의 선물》에 이르기까지 그의 번역(번안) 아동문학 작품을 각종 잡지에서 찾아보았다.
    ·잔물, 〈불 켜는 이〉, 《개벽》3호, 1920년 8월(원작자, 원작 명 불명)
    ·목성, 〈왕자와 제비〉(번안), 《천도교회월보》126호(오스카 와일더
    〈행복한 왕자〉),   1921년 2월
    ·목성, 〈이야기 두 조각〉(동화),《천도교회월보》129호(원작자, 원작 명 불명)
     1921년 5월-귀먹은 집오리 (원작자, 원작 명 불명), 까치의 옷(조선 민화 재화)
    ·목성, 〈귀신을 먹은 사람〉《천도교회월보》137호(원작자, 원작 명 불명), 1922년 1월
    ·방정환, 〈사랑의 선물〉(10편) 개벽사, 1922년 6월 (페로의 〈산드룡〉외)
   〈불 켜는 이〉는 앞장에서도 보았듯이 소년시이고 그가 소년운동을 결정한 시기의 번안이다. 본격적인 동화 번역으로는 〈왕자와 제비〉가 처음이라 할 수 있다. 그는 1920년 9월 15일 전후에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동화 번역은 일본으로 건너가 몇 개월 뒤에 시작 하였다.   그것은 〈왕자와 제비〉의 일러두기에 실려있는 글 〈동화를 쓰기 전에-어린애 기르는 부형과 교사에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어린이를 사랑한다. 어린이는 시인이다."라고 말한 후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더 맑고 더 깨끗하고 더 신성한 시인되게 하고 싶다. 이 생각으로 나는 이 값있는 선물을 손수 만들기 위하여 이 새로운 조그만 예술에 붓을 댄다.
   그리고 나는 이 새 일에 착수할 때에 더욱 우리 교(敎)중의 더 많은 어린 동무를 생각한다. 어여쁜 천사 인내천(人乃天)의 사도(使徒), 이윽고는 새 세상의 천도교의 새 일꾼으로 지상 천국(地上天國)의 건설에 종사할 우리 교 중의 어린 동무로 하여금 애 적부터 시인일 적부터 아직 물욕의 마귀가 되기 전부터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동경하게 하고 싶다.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찬미하게 하고 싶다. 영원한 천사가 되게 하고 싶다.
   늘 이 생각을 잊지 말고 이 예술을 만들고 싶고 또 그렇게 하련다.
   나는 이 일이 적어도 우리의 새 문화 건설에 큰 힘이 될 줄 믿고 남 아니하던 일을 시작한다.

 틀림없는 방정환의 '동화 선언'이다. 그의 아동관과 천도교도로서의 입장과 동화관이 하나가 되어 짧은 글 안에 들어가 있다. 아동문학을 하기로 마음먹은 시기는 1920년 가을이나 겨울쯤으로 볼 수 있다. 또 그는 〈이야기 두 조각〉의 일러두기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의 가장 사랑하는 어린 벗에게
   다달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말씀하기로 약속을 하여 놓고 두 달째나 말씀을 하지 않아서 몹시 미안합니다. 빤히 내가 아니 써 보내고도 월보가 오면 동화가 찾아지고 또 없는 것이 몹시 나의 마음에도 섭섭하였습니다. 더구나 일전에 "왜 계속해서 내이지 않느냐"고 독촉하신 모르는 이의 엽서를 받아보고 더욱 더 미안하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쓰려고 쓰려고 하였으나 지지난 달에는 몸이 갇혀 있느라고 쓰지 못 하고, 지난 달에는 학교 일로 쓰지 못하고, 마음 속으로 미안한 마음만 그윽하던 중 이번에 또 학교일, 청년회 일로 바빠서 생각할 겨를이 없어 또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미안에 미안을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어린 벗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 속에 진정으로의 섭섭함을 얼마라도 덜기 위하여 이번에는 급한 대로 짤막짤막한 것을 주셨(줄여?)쓰겠습니다.
   예술 중에서도 가장 어렵다는 동화 창작을 그리 함부로 쓸 수도 없고 하여 이번에는 창작만은 쉬고 다른 것을 쓰기로 하고 다음 달부터 느긋이 생각하여 반드시 좋은 새 것을 쓸 것을 다시 약속하여 둡니다.

 글 중에 "체포된 몸"이라는 것은 '민원식 살해 사건'이라는 생각지도 알았던 사건에 휘말려 취조를 받았던 일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천도교청년회 동경지부의 전 회원이 잡혀가 취조를 받앗고 초대 지부장인 방정환의 취조는 더 철저했으리라 생각된다. 또 '청년회의 일'이라는 것은 1921년 2월 13일에 막 결성된 이 지회의 일을 말한다. 이 글을 통해 방정환이 《천도교회월보》에 작품을 손쉽게 발표할 수 있는 좋은 조건에 있었음도 알 수 있다.
   방정환은 일본에 가서 비로소 당시 일본이 수용하고 있던 수많은 세계 명작 동화, 세계 민화, 일본 창작 동화를 접했다. 그것은 소년 운동의 알맹이 만들기에 애쓰던 그에게, 또 문학 청년이었던 그에게 결정적인 운명의 만남이었다고 생각된다.

 2.세계 명작 동화 〈사랑의 선물〉(생략)
    3.'어린이'라는 말(생략)

3장 도쿄 시기

1.방정환의 하숙과 일시 귀국 (생략)

2.도요(東洋)대학 청강생

방정환의 도요(東洋)대학 학적 기록은 어떨까? 글쓴이가 1997년 11월 4일에 도요대학의 이노우에 엥료 기념학술센타 닛다 고오지 소장에게 받은 정식 답서는 다음과 같다. 

질문 하나/ 방정환 청강생의 기록    
  회답 / 당시 도요 대학 (대학 및 전문학부)의 입학에는 제 1 종생(種生), 제2 종생(種生), 청강생별로 있었습니다만 방정환은 다이쇼 10년 (1921)4월 9일에 전문부 문화학과에 '청강생'으로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이 이전 재적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질문 둘/ 방정환 청강생 혹은 전문학부 때 받은 강의명(학년별)
  회답/ 학적부 상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질문 셋/ 방정환 청강생 혹은 전문학부 때 취득한 단위(학년별)
  회답/ 학적부 상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질문 둘 및 질문 셋에 대해서는 학생부 이외에 수강한 강의 명이나 단위 수 등을 기재한 자료가 있는지 없는지 조사했습니다만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질문 넷/ 학생부에 기재되어 잇는 주소(하숙)와 본적
  회답/ 주소 : 스가모조 이케부쿠로 177    
          본적 : 조선 경성 견지동 118 호주 방한용 장손

질문 다섯/ 중퇴 또는 퇴학한 사실이 있으면 날짜와 이유
   회답/ 퇴학 다이쇼 11년(1922) 3월 30일,   퇴학 이유에 대해서는 기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질문 여섯/ 그 외에 방정환 연구에 참고가 되는 학적 사항
  회답/ 미동공립학교 연구에 참고가 되는 학적 사항
          다이쇼 2년(1913) 3월 23일 졸업

 이상이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일본에 간 1920년 9월 중순부터 1921년 3월까지 무엇을 한 것일까, 또 1년 후에 퇴학한 것은 왜일까, 퇴학 후 다른 대학에 다닌 것인지? 등등이다.
   앞장에 〈몽환의 탑에서〉의 문장 중에 "이렇게 쓸쓸하나마 쓸쓸한 중에도 억지로라도 자미(滋味)를 붙이고 학생 시대의 하루하루를 보냅니다."가 있다. 이 글은 1922년 1월 19일에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그는 당연히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학적부에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의 기술대로 하면 방정환은 당시 도요대학 철학과에 청강생으로 다니고 있었다. 청강생의 규칙은 다음과 같다.

 보통청강생, 특별청강생의 2종류로 구별한다. 보통청강생이란 학급을 정하고 청강하는 자를 말하고 특별청강생이란 어떤 학급에 구애됨 없이 임의로 학과를 청강하는 자를 말한다. 

 2학기는 9월 11일부터 이미 시작되었고 9월 15일 전후로 늦게 일본에 온 그는 특별청강생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다음 해 1921년 4월 그는 도요(東洋)대학 문화학과에 청강생으로 입학했다. 이 때는 보통청강생이었던 것 같다.
   이 해 4월 도요(東洋)대학은 학제를 개혁하고 문화학과와 사회사업학과를 증설한다. 그리고 4년제 대학부에 인도철학윤리학과, 중국철학동양문학과 2개 학과를 두고 전문부로 통칭되는 3년제 전문학부에는 윤리학교육학과, 윤리학 동양문학과, 문화학과와 야간에 사회사업과 4개 학과를 두었다.
   신설된 2학과 창설에 대해 《도요(東洋)대학 백년사》는 다음 같이 서술하고 있다.

 신설취지는 다음과 같다.
   현재 사상 문제 사회 문제를 논하는 일반 경향이 항상 철저한 근거를 지니지 못하는 것에 애석하고 또 현대 교육이 철학적 상식 보급에 미흡함을 고려하여 여기에 문화학과를 창설해 철학을 중심으로 문예 및 사회 문제를 연구하고 진실로 신문화의 의의를 깨닫게 한다. 또 동시에 사회사업과를 신설해 특히 통학자의 편의를 위해 본과에 한해 야간에 다니도록 하여 사실상 본국에 거의 결여된 사회사업에 종사하는 실증적인 인재 양성의 목적을 달성하도록 한다.
                                                                                                     -《50년사》132쪽

 이 취지는 신설학과 피로연에 학장 사카이노 사토이가 말한 것과 같으며 1920년대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지금까지 되어 온 도요(東洋)대학 역사의 낡은 껍질을 부수고 적극적으로 시대 요구에 부응하려 한 것이었다. 한학, 철학(주로 불경)을 중심으로 한 "향불 내 나는" "고색창연한 (문화학과 제 1기생의 말) 도요(東洋)대학이 현대 사회 문제에 눈을 돌리고 시대와 함께 살아가는 인간 양성을 목적으로 문화학과, 사회사업과를 개설한 것은 도요(東洋)대학으로서는 획기적인 실험이었다. 더욱이 문화학과 개설에 즈음해서는 도요(東洋)대학 문예연구회의 활동이 대학당국에 본보기가 되었다고 한다.
   같은 《백년사》의 〈문화학과 개시와 입학생〉항목의 일부를 인용한다.

 문화학과 창설이 당시 입학지원자에게는 어떻게 비치고 있었는지 당시에 입학한 이시카와 교세-본명 다이치, 도쿄 아사히신문 기자-가 '그리운 문화학과'란 제목으로 《도요(東洋)대학 신문》(제 86호 쇼와 6년 12월 7일)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여하튼 지금도 말하자면 수도 안의 일반 학생에게는 (일부 독지가를 제외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도요(東洋)대학이 우리 나라 서양철학계의 대가 도쿠노 박사, 세상에는 많이 알려지 않았지만 숨어 있던 독학 향토학계의 원로 저 도쿠노 박사가 과장으로서 우뚝 솟았다라는 그 일도 놀랄 일이었는데 와쓰지 데쓰로 (일본문학사, 유럽문학사, 윤리학, 역사철학, 예술론), 다베시 게지(문예사상, 영문학), 오니시 가쓰레(미학), 이데 다카시(윤리학, 서양철학사), 다니베 요시토모(일연종강의), 야나기 무네요시(종교철학), 이다가키·가키우치 마쓰조(사서학), 다시로 미쓰오(독어) 등등 모든 교수들이 즐비하게 말머리를 나란히 한 진용은 당시에는 교육계의 경이였고 특히 희귀한 현상이었으며 수도 안의 모든 문에학생들이 매력을 느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고도 남는다. 나를 막론하고(당시 나는 와세다대학 문과에 있었다) 18명에 가까운 신입생 중 적어도 반 이상이 2,3년을 희생하면서도 이 진영에 참여했던 것이었다.

 이렇게 회상하고 있으며 더욱이 "여기에는 남녀 공학의 자유가 있었고 쓸모없이 입학자격 운운하는 시대착오나 승격에 따르는 관료적 속박이 하나도  없었다. 특히 수십 명의 학력 높은 여학생과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전례에 없었던 일이었다."라고 쓰고 있다.
   다이쇼 10년 문화학과 입학자의 학적부를 살펴보면 제1 종생(種生)으로 36명(3명은 조선인), 청강생 83명(10명이 여자, 40명이 조선인, 1명이 중국인)합계 173명이 입학자였다.
   조선인 입학자가 청강생에 몰려 있는데 어째서 40명이나 입학자가 있었던 가는 확실하지 않다. 11년도 거의 같은 수의 조선인 입학자가 있었다. 앞에 기술한 이시카와 교세의 회상에도 있듯이 문화학과의; 학과 양성과 우수 교수들 때문이었을까? 또 학내 타 학과에서 수십 명이 전과했다.

 이상에서 알 수 잇듯이 약간의 낡은 체질을 갖고 있었던  도요(東洋)대학은 1887년(메이지 10년)에 '철학관대학'이 되고 이노우에 엥료 사직 후 1906년(메이지 39년)에 다시 개칭되어 ' 도요(東洋)대학'이 되었다.
   조선인 학생이 1921년에 한꺼번에 늘어난 이유는 명확하다. 3·1독립운동 패배 후 지식, 신문명을 익히는 것이야말로 민족을 구하는 길이라는 많은 젊은이들의 애국적 각오가 이 학문열을 초래한 것이다. 국내에도 고학생이 넘치고, 일본에도 일시에 많은 유학생이 몰려온 시기의 정점이 1921년 4월이었다. 그것은 도쿄발 '유학생 급증'이란 동아일보 기사에도 확인할 수 있다.

 재작년 이래로 일반 향학심이 늘어감은 현저한 사실이며 우선 동경 있는 조선 유학생으로만 본대도 작년 이후에 비상히 증가되어 이왕으로 말하면 오륙백 명 내외이던 학생이 일시는 이천에 가깝다고 하였으며, 또 금년 춘기로 볼지라도 재정공항의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년보다 다수히 건너왔을 뿐 아니라 금년부터는 중학부터 시작하여 착실히 밟아올라가고자 하는 사람이 매우 많은 모양인데 우선 한두 가지의 실례를 들건대 경응보통부(慶應普通部) 사 년 급에서 오륙 명의 보결을 한 데 대하여 육칠십 명의 조선 학생이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하며 조도전 대학 전문부 정경과 (早稻田 大學 專門部 政經科) 같은 데에는 지금까지의 출원인 수만 하여도 일백오십 명이 넘는다 한즉 기타 일반 현상을 가히 짐작할 만하겠더라(동경)

  문화학과 조선인 입학생의 급증도 이 같은 조선사회의 흐름이 배경이 된 것이다. 물론 방정환도 이 흐름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한데 그는 왜 문화학과를 선택한 것일까? 여기에 대한 대답은 쉽지 않지만 몇 개의 요인을 들 수 있다.
   첫째, 문화학과에 조선을 이해하는 야나기 무네요시를 비롯해 교수진이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고 둘째, 같은 기수의 문화청강생 입학자 중에 같은 천도교 정중섭도 있었다.
   이런 친구관계도 생각할 수 있다.
   방정환이 어떤 과목을 청강했는지 기록이 없어 유감스럽다. 그러나 개강과목을 보면 아동학을 제외하고는 문화학과에 다닌 적극적인 의도나 목적은 현재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1922년 3월에 퇴학한 이유는 그가 이 시기에 각종 잡지에 발표한 문장 안에 한 번도 보이지 않으며 지금까지 한국의 방정환 연구에서도 언급되지 않은 새로운 사실이다.
   퇴학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3월 30일이라는 학년 말 시기에 퇴학한 것을 봐서 사건에 관련된 퇴학은 아니고 스스로 퇴학한 가능성이 높다. 가설로서 1921년 말에 〈사랑의 선물〉을 번역한 그가 더욱더 본격적으로 아동문학 공부를 하고 싶어서 당시 아동도서가 제일 많이 소장되어 있던 오오하시도서관[박물관(博物館) 소유로 당시 일본에서 이용률이 제일 많았다고 한다]에 열심히 다니게 된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은 가설로서 적합하지 않다.▣ (이 글은《어린이 문학》2000년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