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 문학의 재조명

원종찬


  1.머리말

  현덕(玄德, 본명은 玄敬允, 1909-?))은 사람들에게 아직 낮선 작가이다. 그는 등단과 동시에 화려한 조명을 받았으나, 일제 시대에 겨우 이 년 남짓(1938-41) 작가 활동을 한 게 전부라서, 월북 이후론 크게 주목되지 못했다. 월북 문인들이 해금과 함께 활발하게 연구될 때에도 현덕에 대해서만은 그러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살펴보는 것은 현덕 문학을 재조명하는 이 글의 문제의식을 제공해 줄 것이다.
  첫째는 그가 카프에 소속된 작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월북 문인들에 대한 재조명은 주로 카프 문인들에 집중되었으니, 이는 80년대가 민족문학 또는 계급문학 운동의 고조기였음과 관련된다. 문학 연구와 비평이 밀접한 연관을 갖고 당대 문학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면서 현실 변혁에 대한 의지를 고무시킨 80년대 민족문학 운동은 그 빛나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카프와 비슷한 오류를 일부 반복한 점에서 냉정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둘째는 그가 해방 이후에도 뚜렷한 작품활동을 전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해방 직후 다시 한번 민족문학 운동이 고조되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카프 시기와 함께 이 시기 역시 관심의 초점이 되었는데, 카프 출신 문인들뿐 아니라 새로운 신진 작가들에 대해서도 주목하였으나, 현덕은 여기에조차 끼어들 수가 없었다. 단지 그가 문학가동맹의 출판부장이었다는 사실만 가끔 환기될 뿐이었다. 일제 시대의 작품 활동과 해방 이후의 행적에 관한 연속성을 파악하는 데에서 그 동안 합당한 근거를 마련하지 못한 것에는 첫째 오류의 시각이 끼어 있다.
  셋째는 그한테 장편소설이 없고 북한에서의 작가적 명성도 희박한 데다가, 남한에 연고자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탓에 그의 생애조차 감감하다는 점이다. 과작(寡作)의 작가였던 만큼 그에 대한 연구가 시들할 수밖에 없음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 또한 30년대 후반기 문학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 동안 충분히 성숙되지 않은 사실의 반영이다.

  일찍이 신경림은 현덕에 대해, "카프 계열로부터는 그 완벽한 예술성 때문에, 예술지상주의로부터는 그 결연한 역사의식 때문에 경원당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대관절 이러한 모순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현덕의 작가 활동은 2년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어도, 그 시기의 특수성이 오늘날 비상한 관심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아동문학을 포함해 자못 왕성하게 활동한 결과물 대부분이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어, 민족문학사든 아동문학사든 그를 결코 빼놓을 순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가 그를 다시 주목하는 까닭은, 첫째로 그에 대한 그간의 미온한 문학사적 평가를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고, 둘째로 그를 통해 30년대 후반기 문학의 성격을 잘 살피면 오늘의 시점에서 의미 있는 시사점을 얻게 될 것이라는 믿음에서이다. 현덕과 그의 문학에 대한 재조명이 그와 깊은 연고를 맺고 있는 인천에서 진행된다는 점에 남다른 감회가 있다.


  2.현덕의 생애

  현덕은 서울 삼청동의 한 별장에서 태어났다. 이는 구한말 궁궐의 수비대장으로서 종2품에까지 오른 그의 조부 현흥택(玄興澤, 1858-1924)의 위세를 반영한다. 그러나 그의 부친 현동철(玄東轍)은 금광에 손을 대다 가산을 탕진하고 밖으로 나돌았으며, 식구들은 각자도생으로 친적 집들을 돌며 살았다. 그는 당숙네인 대부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대부공립보통학교에서 2년 여 기간 공부하고 제일고보에 입학(1925)했으나 학비 때문에 1년을 채 다니지 못하고 중도 포기한다. 수원 발안 등지에서 막노동일을 했으며, 일본에도 건너가 온갖 잡일을 다해봤지만 몸이 쇠약해 결국은 돌아와서 문학에 뜻을 두게 되었다. 193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고무신]이 가작으로 입선되었다. 이후 김유정과 깊은 친교를 맺는다. 서울 동대문 밖 낙산과 줄기를 같이하는 산동네에 유정과 현덕이 각각 경사면을 달리하여 살았다. 김유정을 통해 안회남도 알게 되는데, 안회남은 현덕의 등단과 문단 활동을 많이 도왔다. 김유정이 죽고난 뒤 인천의 친척집에 기거하면서 소설 [남생이]를 쓴다. 그것이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1등으로 당선하자, 다시 서울로 올라와 생활을 하면서 [경칩](1938.4.), [두꺼비가 먹은 돈](1938.7), [골목](1939.3), [잣을 까는 집](1939.4), [녹성좌](1939.6-7), [군맹](1940.2) 등의 작품을 잇달아 발표한다. 1938년부터 39년에 걸쳐 {조선일보} 부록으로 매주 발행되던 {소년조선일보}에 잇달아 '노마' 시리즈 동화를 발표했고, 어린이 잡지 {소년}에는 주로 소년소설들을 발표하였다.
  본디 몸이 허약한데다 유정처럼 그도 폐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중편소설 [녹성좌]와 [군맹]을 신문에 연재할 무렵에는 {소년조선일보}에 쓰던 '노마' 시리즈 동화를 아우 현재덕(玄在德, 1912-?)에게 넘겨준다. 곧이어 1년 여 동안 요양차 황해도 지방엘 갔다오는데, 당시 문단을 새롭게 주도해간 {인문평론}과 {문

장}에 그가 단 한 편의 작품도 발표하지 못한 까닭가 여기에 있다. 태평양 전쟁이 터지고 창작활동이 어렵게 된 시기에 그는 와카모도(若素) 제약회사의 조선출장소 광고부에서 일을 했다. 민족문학 작가회의에 소속되어 있는 전승묵(全承默) 시인이 당시 이 회사의 급사로 있으면서 현덕과 알고 지냈다는데, 전 시인의 말에 따르면 이 회사엔 이른바 불령선인들이 많았다. 다마야 고히찌(玉俗高一)라는 일본의 리버럴리스트 작가가 초대 출장소장을 맡았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 현덕은 함께 근무했던 화가 박기성(朴基星:해방 후의 행적으로 보아 월북했을 것이라 함)과 둘이서 끝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임화와 오장환이 자주 찾아 왔다고 하며, 특히 현덕보다 아홉 살 아래인 오장환은 길 건너편 광산 사무소에 다니고 있었던 관계로 가끔씩 시 원고 뭉치를 가져와 현덕에게 보여주곤 했다. 향토색 짙게 배인 오장환의 제3시집 {나 사는 곳}은 바로 이때 씌어진 것들을 해방 후에 묶어낸 것이다.
  해방이 되자 현덕은 회사의 종업원관리위원장으로 추대된다. 좀체로 말이 없고 웃음으로 대답을 하는 성격이어서 주위 사람들에게 군자로 통했다고 한다. 현덕은 관리위원회 사무를 거의 간섭하지 않았으며 문학가동맹의 일로만 바빴다고 전승묵 시인는 전한다. 그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소설부 위원이자 아동문학부 위원이었으며, 홍구에 이어 출판부장을 역임했다. 이 때 출간된 소설집 {남생이}에는, "병고를 무릅쓰고 문학운동과 문예공작에 종사하는 인간으로서 이 성실성이 반드시 문학적으로 결실할 것을 바라마지 않는다"고 끝을 맺는 김남천의 발문이 실려 있는데, 이로써 해방 직후 문학가동맹 사업에 전념한 현덕이 소설을 쓰지 못한 이유가 설명된다. 문학가동맹 서울시지부의 소설부 위원장, 문학대중화위원회의 위원으로서도 활동했고, 정부 수립 후엔 보도연맹의 가입을 피해 지하로 숨어 지내며 쇼로홉의 {고요한 동}(제1권, 대학출판사, 1949)을 노어 전공자인 이홍종과 공동으로 번역 출간하였다. 6.2

5 전쟁이 나서 서울이 인공 치하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현덕은 밖으로 나온다. 동란 전에 월북한 문인들이 인공 점령하의 서울에 와서 조직한 남조선문학가동맹의 명단을 최근 입수해 보았더니, 안회남이 위원장을 맡았고, 현덕은 부위원장에 이름이 올라 있다. 감옥에서 나온 이용악과 이병철이 각각 선전부장과 사업부장인 것을 보면, 현덕은 보도연맹의 가입을 피한 경력이 대우받은 모양이다. 각종 전쟁기 회고물에서 현덕의 이름을 찾기 어렵고, 어쩌다 나타나더라도 뚜렷한 활동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그의 조용한 성품 탓이 아닌가 한다. 현덕의 이름이 나오는 거의 유일한 다음의 글은 이런 사정을 어느정도 엿보게 해준다.

  … 종로 네거리 한청빌딩에는 문학동맹과 연극동맹과 미술동맹이 판을 차리고 이른바 김일성의 노래와 소위 인민항쟁가가 귀를 아프게 했다. 문학동맹에는 형무소에서 소위 해방되어 나왔다는 이용악과 이병철이 창백한 얼굴에 도끼눈을 하고 있었고, 소위 지하에서 나왔다는 현덕이 앉아 있었고, 이북에서 넘어왔다는 안회남이가 위원장이 되어 호령을 하고 있었다.(강조 필자)

  그는 9.28 서울 수복 때 월북을 한다. 호적엔 50년 9월 27일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신고자는 아우의 처인 이계희).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아우 현재덕은 결혼신고(1950.1)가 되어 있으나, 현덕은 미혼인 채이다. 그는 결혼식을 하지 않고 동거 생활을 해왔다는데, 월북 당시 5살쯤 된 딸 아이와 갓난아이가 있었다니까 해방 뒤에 곧 동거를 시작한 것으로 짐작된다. 모친과 처자식 모두 데리고 갔으며, 아우 현재덕도 함께 월북했다. 월북하지 않은 식구로 부친과 누이들은 남한에서 사망하였고, 현재덕의 처와 딸이 지금 서울에서 살고 있다. 현덕은 월북 후에 전쟁과 관련한 몇 편의 작품을 썼으나 대부분 자연주의 작풍으로 호되게 비판되었으며, 한동안 이름이 보이지 않다가 60년 전후에 다시 활동하여 {수확의 날}(1962)이라는 단편집을 한 권 낸다. 하지만 그 이후론 어떤 활동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북한 아동문학과 관련해서는 아우 현재덕의 이름만을 간혹 만나볼 수 있을 뿐이다.


  3.카프 해체 후 30년대 문학의 조건

  한국의 근대문학은 20년대에는 민족과 계급의 대립 구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사상적 구도는 30년대 들어 미학적 구도로 바뀌는데,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립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20년대 문학의 대립 구도가 고스란히 30년대 문학의 대립 구도로 수평 이동한 것은 아니다. 상대 비교를 전제로 할 때, 30년대 문학의 미학적 구도는 그 성격으로 보아 20년대 문학의 사상적 구도와 계기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30년대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단순히 대립 관계로만 파악하는 것은 역사적 계기를 무시한 형식 논리의 소치이다. 무엇보다 작품의 실상이 이와 부합하지 않는다. 또한, 20년대 문학 일반이 리얼리즘의 확립 도정이라는 공통의 기반 위에 놓여 있었음을 염두에 둔다면, 30년대의 리얼리즘은 20년대 리얼리즘의 단순 연장일 수 없음이 오히려 분명해진다.
  여기엔 30년대의 새로운 현실이 가로놓여 있다. 그리고 모더니즘의 본격적인 발흥이 이것과 대응한다. 리어리즘에 기반한 20년대 민족문학이 민족을 계급으로 조정하는 힘에 의해 현실에 대한 한층 심화된 인식에 도달했듯이, 30년대 민족문학은 리얼리즘을 모더니즘으로 조정하는 힘에 의해 비로소 문학에 대한 한층 심화된 인식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전자에 카프가 존재했다면 후자엔 구인회가 존재할 터이다. 결국은, 민족과 계급이 모두 근대성이라는 한 몸의 두 얼굴인 것과 마찬가지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도 함께 근대성의 두 얼굴인 것을 옳게 파악하는 데서 민족문학 또는 근대문학에 대한 논의가 바루어질 것이라 판단한다.
  카프 시기와는 다른 문제 의식을 갖고 출발한 30년대 신진 작가들을 평가함에 그동안 보이지 않는 두 개의 통념이 작용해왔다.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하거나, 모더니즘의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일이다(그 역의 시각도 존재한다). "정치적 후퇴에 대한 예술적 보상"이라는 언표가 이 현상을 요약한다. 그런데 30년대의 실상을 잘 들여다보면 사정이

 그리 만만치 않다. 우선 이 시기 모더니즘의 발흥은 안으로 카프 시기의 문학적 한계와 맞물려 있고, 밖으로 새로운 근대적 풍경과 맞물려 있다. 뿐 아니라 파시즘의 진군이라는 시대의 폭력도 걸쳐 있다. 우리에게 모더니즘은, 소박한 반영론으로서 속류 사회학주의에 경사된 카프식 리얼리즘을 쇄신하는 역사성에다 식민지 자본주의라는 특수성까지 겹쳐 있는 것이다. 오늘날 모더니즘의 외연이 무한히 확장되어 하나의 개념으로선 공허한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이 시기의 모더니즘을 '역사적 모더니즘'으로 파악하는 시각을 확보해둘 필요가 있다.
  한편, 30년대 후반기는 식민지 자본주의가 본격화함에 따라 도시화가 진전되고, 농촌의 피폐화, 도시 세궁민과 실업자의 증가 현상이 두드러졌으며, 파시즘의 강화에 따른 정치 사상 운동의 퇴조, 카프의 와해와 전향 등 지식인에겐 환멸과 암흑의 시기였다. 임화는 이 시기 소설의 딜레마를 시대 현실의 중압을 들어 설명한다. "작가의 희망을 살리려면 리얼리즘 대신 로맨티시즘을 취"하지 않을 수 없고 "현실을 있는 대로 그리면… 오히려 암담한 절망을 얻게 되"는 현실, 곧 "작가의 생각을 살리려면 작품의 사실성을 죽이고 작품의 사실성을 살리려면 작가의 생각을 버리지 아니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 소설이 이른바 "세태소설과 내성소설로 분열"해간 현상 역시 "시대의 이상과 현실이 너무나 큰 거리로 떨어져 있는 현실 자체의 분열상의 반영"(347-8쪽)일 터였다. 따라서 30년대 문학은 "말할려는 것과 그릴려는 것과의 분열"(346쪽)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는 혼돈과 방황, 암흑의 현실을 배경으로 한다. 전래의 리얼리즘은 이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여 아이디얼리즘으로 증발하느냐, 아니면 자연주의로 포복하느냐의 갈림길에 처한 것이다.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동맹으로 표현된 '최초의 문단 좌우합작노선'은 기실 30년대 후반기의 이러한 조건 위에서 그 기초가 마련된 것이다. 파시즘이 강화되고 카프가 와해된 이후부터

뚜렷한 이념적 구심이 없었다든가, 코민테른 노선으로 반파시즘 인민전선이 등장했다는 사실을 어느정도 고려할 순 있겠지만, 그보다는 카프(리얼리즘) 쪽과 모더니즘 쪽의 상호 반성에서 사상적·미학적 합류의 기운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당대의 비평가 임화와 김기림의 글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30년대 후반기의 문단이라 할 수 있는 {조선일보} 출판부와 {조광}, 일제 말 가장 유력했던 {문장}과 {인문평론}을 꼼꼼히 살펴보더라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30년대 후반기의 작품들이 그 점을 강력히 뒷받침한다.


  4.현덕의 소설

  30년대 소설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20년대 소설의 '현실'과 비견되는 '일상'이 하나의 문제적 범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둘은 단절이 아니라 상호 긴밀한 관계에 있는 만큼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라 할 수 있다. 현실보다 일상이 문제로 된다는 것은 '낡은 것이 사라졌지만 새로운 것은 아직 등장하지 않은' 이념적 위기와 과도적 상태를 말해주는 것이다. 한층 겹으로 에워쌓인 새로운 현실 앞에서 작가들이 그것을 포획할 새로운 방법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래서 30년대엔 '지식인의 자의식'이라는 새로운 글쓰기 수법이 등장하여 수많은 내성과 세태 소설을 낳는다. 이상과 박태원이 선두에 섰고, 최명익, 유항림, 허준 등 많은 신진 작가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이들의 소설을 리얼리즘과 대립적인 의미의 모더니즘으로만 파악할 때 그 내용은 대단히 협소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들에게도 문제는 여전히 '현실'로서의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30년대 소설의 일상성 탐구는 새로운 방법의 고민과 함께 작품의 육체성을 진전시키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현덕의 소설에는 위의 작가들만큼 지식인의 자의식이 드러나 있지 않다. 이것은 그의 소설이 주로 농촌과 도시 변두리의 하층민 세계를 다루고 있는 데에서 비롯한다. 지식인의 자의식 대신 현덕의 소설엔 나이 어린 '노마'가 등장한다. 이 노마의 존재는 그의 소설을 가장 매력적이게 하는 동시에, 그동안 그의 소설의 한계로 지적되어 온 요인이다. 노마의 순진성은 향수의 매력을 지니되 결국은 현실에 대한 순진한 시각의 반영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현덕 소설의 중층 구조를 간과한 것으로, 그 판단에는 분명히 카프식 리얼리즘의 시각이 배어 있다. "향토색 짙은 모더니즘적 기법이 바로 현덕의 미학적 감성대… 인조 보석을 연상하리만큼 치밀한 구성력… 숨겨진 토착어를 채광하여 가장 적절한 위치에다 정렬시키는 깔끔한 장인 의식… 그러나 오히려 이런 치밀성 때문에 민중적 친근감이나 구수한

 흙 냄새가 사라져 버린 느낌이다." "동심의 눈으로 세계를 본다는 자체가 순수성의 한계 때문에 사회와 삶의 근본적인 갈등과 모순에 이르지 못함을 예시한다." "소작인이 소작인의 적대 관계인 상태로 접어들어 농민 조합 운동의 분위기는 그림자도 없이 되어 버린다." "갈등은 못사는 사람들끼리 서로 물고 뜯고 하는 구조를 취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주관을 살리자면 작품의 사실성이 죽고 작품의 사실성을 살리자면 주관이 죽어버릴 수밖에 없다'던 임화의 말을 상기해보지 않을 수 없다. 현덕이 일제 말기에 작품 활동을 했으면서도 아이디얼리즘과 자연주의라는 두 개의 함정을 피할 수 있었던 데는 바로 노마의 존재가 관건이 된다.
  등단작 [남생이](1938.1)와 곧이어 발표한 [경칩](1938.4)은 노마의 존재가 매우 중요한 장치로 기능하는 작품들로서, 내용상으론 [경칩]에서 [남생이]로 이어지는 연작의 구조를 갖고 있다. 이후로 계속해서 [두꺼비가 먹은 돈](1938.7), [골목](1939.3), [잣을 까는 집](1939.4), [녹성좌](1939.6-7), [군맹](1940.2) 등이 발표되는데 농촌에서 도시로 옮아가는 이들 소설의 작품현실은 '식민지 자본주의화의 모순'(신경림)과 정확히 조응한다.
  중요한 것은 [남생이]나 [경칩]에서 노마는 일관된 서술자로 등장하지 않고, 여러 등장인물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노마를 제외한 주요 등장인물의 세계는 그것대로 당대의 실상과 삶의 모순을 리얼하게 드러낸다. 여기서 노마는 당대 삶의 파탄 구조와 타락상을 극명한 대조 효과로 부각시키는 존재이다. 그러나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과연 현덕의 소설이 동심이란 순수성의 한계 때문에 사회와 삶의 근본적인 갈등과 모순을 그려내지 못했고, 하층민들끼리 물고뜯는 구조에 지나지 않는지 살펴보자.
  첫째로 사회와 삶의 근본적인 갈등과 모순을 그려내지 못했다는 비판은 동심적 시각 때문에 계급 관계를 제대로 반영

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겠다. [남생이]에서 노마 아버지는 "지주가 보는 앞에서 마름 김오장의 멱살"(44쪽)을 잡아쥔 까닭에 소작을 잃고 부두의 자유노동자가 된다. [경칩]에서 홍서네는 병들어 땅을 부칠 가망이 없는 노마네 소작에 마음이 끌려 지주집 안주인한테 달걀 꾸러미를 들고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소작만으론 입에 풀칠을 할 수가 없어 개펄로 부두로 날품 일을 나가야 했던 노마네나 홍서네였다. [뚜꺼비가 먹은 돈]에서 노마가 잃어버린 돈은 농촌 계몽 사업과 관련해 감옥에 갇힌 노마의 아버지와 연결되고 있다. 물론 이런 계급적 갈등은 이들 소설의 중심 내용은 아니다. 그렇게 하자니 사실이 희생될 수밖에 없음을 작가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신에 작가는 농민의 생활고와 이농민의 현실, 그들이 도시 변두리로 자리하면서 겪는 여러 문제들을 주목하였다. [잣을 까는 집] [골목] [군맹]은 도시 변두리 산동네, 특히 세궁민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잣을 까는 집]은 일자리를 잃은 석공네의 비참한 살림 형편을, [골목]은 실업자 지식인이 겪는 정신적 고통을 다룬 작품이고(주인공은 허영기 그득한 아내의 성화에 날마다 시달리는데, 자기가 순사 시험에 떨어질 체격임을 알고서야 시험을 보기로 한다), [군맹]은 무허가 토막 철거를 둘러싼 주민들의 집단적 대응을 내용으로 삼고 있다. [녹성좌]는 사회주의 문화운동을 지향하는 이들의 고민과 좌절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다. 모두 떠나더라도 끝내 자리를 지키려는 주인공의 발언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현덕은 일정하게 각성한 주인공들을 작품 속에 포함하고 있으며, 농민, 도시 빈민, 실업자 지식인, 사회주의 문화운동가 등 당대 민중의 피폐해진 삶을 통해 시대 현실에 접근하여 했음이 밝혀진다. 모두 전형적인 상황에 인물을 배치함으로써 리얼리즘 정신을 드높이고 있다.
  둘째로 하층민들끼리 물고뜯는다는 구조에 대해 생각해보자. [남생이]는 우선 30년대 인천항 부두의 생태에 관한 정밀한 보고서이다.

 배와 육지를 잇는 연육교를 중심으로 볏섬이나 소금 따위를 져나르는 부두의 자유노동자들과, 그들을 상대로 하는 무허가 이발사, 들병 장수, 그밖에도 그곳 마당지기 앞잡이에서부터 낙정미를 주워 모으는 사람들까지, 이른바 '선창 벌이'의 생활을 한 폭에 담아내었다. 작가는 이들의 생태를 단지 스케치하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또렷한 인상과 개성을 부여함으로써 당대 삶의 추이를 정확하게 해부해나간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노마는 유일하게 성장의 주인공이다. 아버지가 죽던 날, 노마는 그렇게도 오르려 하나 못 오르던 나무에 기어올라 세상을 거꾸로 바라다본다. 원래 나무에 오르면 기차와 선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자기는 돈을 벌어 병든 아버지와 밖으로 나도는 어머니를 도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노마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털보와 눈이 맞아 아버지를 배반했고, 부친상을 당했어도 나오지 않는 눈물 때문에 갖게 되는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은 동무 영이에 대한 보살핌의 감정으로 옮아간다. 바로 여기에서 이 작품은 도저한 암흑 속에서도 일말의 생기를 내뿜는 것이니, 이것은 최원식 교수가 김유정의 작품에서 주목한 바의 새로운 층위에 값한다.
  [경칩]에서는 노마 아버지의 친구 홍서가 주인공격이 되어 '그러지 않으려도 그렇게 되고마는 안간힘의 밀려남'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곧 이 작품은 홍서가 노마네 소작권을 차지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을 홍서의 내밀한 심리 추적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홍서의 배신은 단순한 배신이 아니다. 이를 위해 작가는 이따금씩 밭두덩을 뛰어다니며 등장하는 노마와 그의 또래 친구들을 근거리 또는 원거리 묘사로 적절하게 구사하여 파멸하는 농촌 풍경을 한층 고적하게 만드는 한편, 시대의 우수로 가득한 향토적 서정을 촉발해낸다. 그리고 회생할 가망이 없는 친구 논을 차지한 데 대한 홍서의 연민이라든지 미안한 감정과, 땅에 대한 농민의 육친적 애정을 진하게 교차시킨다. 여기서 노마의 존재는 홍서의 배반을 개인의 악덕으로 치

부하지 않게 해주는 해학의 장치로서 결정적이다. 홍서가 노마네 땅을 밟고 서서 온갖 감정에 빠져 있는 순간 갑자기 뒤에서 노마가 나타나 말을 건다.

  "우랭이 잡우?"
  "응, 우랭이 잡어."
  홍서는 짐짓 작대기를 짚고 물 속 논바닥을 구부려 들여다 본다. 그러나 지금이 어느 때라고 우랭이가 있으리요, 실은 실없는 말로 들리기 전에 먼저 당황해지고 만다. 어린이에게 완전히 속을 뽑히고 만 감이었다. 홍서는 등줄기가 꼿꼿해지는 자세로 서서 만사를 한갓 침묵으로 때우려든다.
  "거짓부렁야, 우랭이두 없는데."(37쪽)
  
  그런데, [남생이]에서도 그랬지만, 이 작품의 해학성은 거꾸로 가슴을 저미는 통증과 고독감, 연민의 정을 수반한다는 점이다. 파멸은 정작 노마네가 맞이하는 내적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아무것도 모르고 노마가 멀리서 홍서를 향해 막대기 총을 쏘는 장면도 예사롭지 않다). 홍서는 무심결에 되돌아가는 노마를 불러 백동전을 하나 건네 준다.

  담배를 사려고 넣어 두었던 돈이다. 그에겐 적은 돈이 아니로되 아까운 줄을 모르는 홍서였다. 허나 무슨 뜻으로 그 노마에게 돈을 준 것인지는 또 좀 몰랐다. 다만 보리밭 사잇길로 둔덕을 넘어가는 노마의 검정 바지 저고리를 입은 작은 뒷모양이 무한 측은했다. 조금 후 둔덕을 넘어 맞은편 언덕길에 노마를 선두로 조랑조랑 기동이 형제가 뒤를 따라 이리 꾸불 저리 꾸불 멀어 가는 모양이 보일 때 홍서는 좀더 마음이 애련했다.
  점점 그 모양은 졸아지며 언덕 너머로 사라지자 홍서는 자기 한 몸만 천리 만리 외따로 떨어져 있는 듯한 외로움에 사무친다.(38쪽)

  끝 장면에서 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홍서는 친구 노마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리고는 "홍서 자신이 노마 아버지만큼 귀 뒤에 살이 여위든, 아니면 노마 아버지 자신이 홍서만큼 귀 뒤에 살이 오르든"(같은곳) 하지 않고서는 "골수에 사무치는 외로움"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거듭 짙은 외로움에 휩싸인다. 인물의 내면을 꿰뚫고 시대의 본질로 다가서는 이런 대목은 신경향파 작품 이상으로 당대 현실에 대한 고통스러운 자각을 불러일으킨다. 요컨대 노마를 통해 개척한 현덕 소설의 새로운 층위는 무엇보다 당대 현실 속에서 살피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일제 말기로 갈수록 상황은 더욱 악화일로로 치닫게 되었으니, 현덕의 문학도 흔들리다가 마침내 두 방향의 분열을 겪는다. [두꺼비가 먹은 돈]은 노마를 더욱 전경화한 바람에 그야말로 순진성의 세계로 떨어졌고, 가장 적극적인 주인공을 내세운 중편소설 [녹성좌]는 구성과 인물을 장악하는 힘이 현저히 약해서 작품성을 결하고 있다(김남천은 {남생이} 발문에서, 자신이 퍽 주목한 이 작품이 "중단"되고 말았다고 밝힌 바 있으나, 신문 연재물에선 완결된 것으로 되어 있다. 원래 장편으로 구상했던 것을 건강상의 이유로 서둘러 끝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마지막 작품 [군맹]은 새로운 도시개발로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된 성문 밖 토막촌 사람들의 운명과 생태를 다각도로 세밀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철거민들의 집단적인 움직임이 지도자의 매수로 실패하고, 남은 인물들은 "자기 앞에 가로막힌 컴컴한 어둠을 자각"(224쪽)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결국 현덕은 시대의 한계 때문인지, 희망 없는 현실의 암흑을 그리는 것에서 더 나아갈 수 없었다. 그렇더라도 30년대 모더니즘과 함께 연마된, 인물의 내밀한 행동심리를 수반하는 풍부하고도 정밀한 묘사력과, 이를 바탕으로 시대의 본질을 일상성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낸 30년대 후반기 리얼리즘 소설의 특질이 그의 모든 작품을 관류하고 있다.


  5.현덕의 아동문학

  현실의 암흑을 그리는 것 말고 달리 방도가 없었을 때, 현덕이 무엇보다 많이 힘을 쏟아부은 대상이 바로 아동문학이다. [남생이]와 [경칩] 이후, 그러니까 38년 중반부터 현덕은 소설과 함께 동화와 소년소설을 많이 발표하였다. 그의 동화는 노마를 원래 성격 그대로 등장시킨 일종의 짧은 연작으로서 유년의 세계를 다루었고, 소년소설은 졸업을 앞둔 보통학교 상급생이나 중학생 가량 소년의 세계를 다룬 것으로, 이 둘의 장르 특성까지도 아주 분명하게 구별된다. 인물을 또랑또랑하게 살려내는 현덕의 작가정신이 아동문학에서는 더욱 빛을 발한다. 리얼리즘 유년동화와 소년소설의 개척자로서 현덕은 우리 아동문학사에 우뚝 선 존재이다.
  동화에는 노마, 기동이, 똘똘이, 영이가 계속 등장한다. 이들 중 기동이 하나만은 부잣집 아이로서 다른 아이들과 자주 마찰을 빚는다. 그것은 기동이가 가게에서 돈 주고 산 장난감이나 과자 따위로 아이들 앞에서 곧잘 으시대는 탓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사이 좋은 한 동네의 천덕꾸러기들이다. 기동이한테 간혹 부여되는 벌이란 아이들이 저들끼리만 알고 기동이에게는 안 가르쳐 준다든지, 기차놀이에서 손님으로 태워주지 않는다든지 하는 정도이고, 함께 놀 때에도 기동이에겐 끝에 가서 당하고야 마는 배역('쥐와 고양이 놀이'에서 고양이, '토끼 삼형제 놀이'에서 늑대)을 정해 준다는 것이다. 어쨌든 기동이가 가지고 오는 먹을 것이나 장난감들은 가난한 아이들에겐 한없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여기서 노마의 총명함이 발휘된다. 그는 장난감 없이도 각종 놀이를 주도해 나가며, 궁리 끝에 손수 장난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천진하면서도 용기와 지혜를 함께 갖춘 노마의 형상엔 다음 세대를 향한 작가의 의식과 소망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소년소설 가운데 대표작 [나비를 잡는 아버지]를 보면, 마름과 소작 관계에서 빚어지는 갈등 구조이면서도 마름집 눈치를 보며 살지 않을 수 없는 아버지의 현실을 바우가 온몸으로 깨닫고 껴앉는 것

으로 끝이 난다. 소년소설에서는 청소년기의 특성대로 우정과 양심, 의리, 연민의 세계를 주로 다루었다.
  같은 시기에 쓴 것들인데도 소설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과 아동문학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이 이렇듯 다르게 나타난다. 하지만, 동화의 세계에서나 소년소설의 세계에서나 현덕은 확고한 리얼리즘의 정신 아래 작품을 썼다. 더욱이 '계급모순 환원성'을 특징으로 하는 카프 아동문학의 한계를 넘어선 곳에 현덕은 자리한다. 아동문학에서 그는, 어린이의 심리 특성과 독자의 연령을 옳게 파악하고 수용한 일급 작가였다.


  6.맺음말

  현덕의 문학은 30년대의 새로운 현실과 30년대의 새로운 리얼리즘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 그 핵심이 드러난다. 특히 [남생이]와 [경칩]은 '아이디얼리즘'과 '자연주의'를 피하기 위해 고투한 결과로서 30년대 리얼리즘의 한 특질을 보여준다. 이로써 리얼리즘의 문제의식을 떠나 30년대 신진 작가들의 세계를 설명할 수 없고, 또한 카프식 리얼리즘의 관점에서는 그들 세계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현덕의 소설을 '탈정치적, 탈사회적, 탈이념적'이라 평가하는 관점은 30년대 후반기 문학과 현덕 소설의 구조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덕의 아동문학을 순전히 "계급문학의 도식"에 갇혀 있다고 파악하는 관점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현덕의 해방 후 행적을 한갓 돌발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관점은 작가의 생애를 비롯해 우리 문학사의 계기적 발전과 연속성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결과이다.
  민족문학 전체의 유산으로서 20년대 경향문학의 충격과 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의 충격을 정당하게 자리매김해야 할 필요가 있다. 30년대 중반부터 이념적·미학적 대립이 해소되고 문단의 통일적 기운이 무르녹아 있었음을 우리는 현덕의 삶과 문학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30년대 후반기 문학을 살핌에는, 새로운 현실의 도래와 더불어 카프 시기의 낭만적 충동은 거의 소멸했음에도, 당시 모더니즘이 창작에 새로운 활력을 제공해 주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는 최명익, 허준, 유항림 같은 작가에게서도 발견되지만, 백석, 이용악, 오장환 같은 시인에게서도 발견되는 사실이다. 하지만 철저한 리얼리즘 정신에 바탕하지 않고서는 정비석 류의 감각적 통속문학, 김동리나 이효석 류의 신비주의 문학으로 미끌어져 들어가기 또한 쉬운 일이었다.
  이제 30년대 문학의 세련도를 '정치적 후퇴에 대한 예술적 보상'으로 파악하는 시각의 문제점을 다시 돌아보자. 30년대 문

학의 세련도가 정치 사상성의 후퇴를 반영한다는 말에는 분명 일리가 있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이냐 할 때는 또 사정이 다르다. 30년대 문학의 세련도는 현실의 단순 재현이라는 속류 사회학주의로부터 탈피하여 새로운 현실을 포획하려는 문학적 대응의 산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30년대 문학을 바라볼 때는 '파시즘의 대두에 따른 시대의 한계'와 그 속에서도 진행되었던 '한 점 빛을 향하는 힘겨운 고투'를 함께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30년대 후반기의 신진 작가들뿐 아니라, 흔히 카프와 대립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구인회에 속한 작가와 시인들, 예컨대 이태준, 정지용, 이상, 박태원, 김유정 등의 문학을 오늘날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해야 할 필요성이 여기서 비롯한다.
  통상 모더니즘 계열이라 일컫는 작품들을 대하는 자리에서 새로운 형식과 기법에만 눈을 돌려 바닥에 흐르는 저류를 보지 못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현실과 무매개적인 자립적 기호 체계로서 모더니즘의 기법만 따지는 일은 충분히 경계되어야 한다. 한편, 카프식 리얼리즘은 현실의 발전을 역동성 속에서 그려내고자 했을 때에도 본질적으론 권선징악의 구도에 지나치게 강박되어 있었다. 이 점에서 앞으로 전형의 문제도 다시 잘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다.
  민족이냐 계급이냐가 우문인 것처럼, 리얼리즘이냐 모더니즘이냐의 택일적 주문에서도 이젠 벗어나야 하겠다. 페리 앤더슨이 지적한 바대로 새로운 시간의 흐름만을 구성하는 모더니즘의 개념 자체는 매우 공허하지만, 모더니즘은 새로운 문명의 충격에 대한 응수를 형식면에서 탐구하는 힘을 내장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민족문학은, 리얼리즘을 가장 뚜렷한 미학적 원리로 인정하되 현실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모더니즘(모더니티)을 흡수 지양함으로써 자기를 갱신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본다.(민예총 인천지회 주관 제4회 인천민족문학제 발표문,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