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 (이철지 엮음, 종로서적, 1986)』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 

권정생


   내가 예수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나이 겨우 5살 때였다.  일본 토쿄의 빈민가인 시부야(沚谷)에 살고 있을 때였다.  위로 두 누나들이 친구들과 함께 다니던 일요 학교 얘기를 자기네끼리 주고받는 것을 곁에서 들은 것이다.  기도하는 얘기, 잠자리 채 같은 연보 주머니에 1전 짜리를 던져 넣는 얘기,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얘기를 했다.  옷을 벗고 알몸뚱이가 된 남자가 십자가란 나무 위에 매달려 죽었다.  머리엔 가시관을 썼기 때문에 얼굴엔 피가 줄줄 흘렀고, 손과 발에 못을 박았기 때문에 굉장히 아팠을 거라고 했다.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죽게 되었는가는 몰랐지만, 그때 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모습은 어린 내게 꽤나 심각한 충격을 가져다 준 것은 분명했다.  그때 내가 멋대로 그려 본 예수님의 십자가 모습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핏기 없는 검푸른 얼굴에 붉은 피를 흘리며 공중에 높이 매달린 남자가 무섭기보다 측은하게만 여겨졌었다.
  또 하나는 누나가 가르쳐 준 일요 학교의 노래 중에 딱 한 가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다. 예수님의십자가 모습과 거의 일치된 슬픈 동요의 가사를 우리말로 옮겨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잇사 아저씨

잇사 아저씨
   아저씨네 집은 어디이셔요?
   우리 집은 북쪽나라 먼 산 속
   그 산 속 깊숙이
   오막집 한 채
   참새들과 얘기하며
   살고 있지요.

2차 대전이 한창 치열했던 1944년 12월, 토쿄의 폭격은 빈민가의 구석구석까지도 잿더미로 바꿔놓았다. 우리 집은 군마켕(群馬縣) 초마고히(妻戀)라는 시골로 이사를 했다.  거기서 해방을 맞아 후지오카(富岡)로 일시 옮겼다가 1946년 3월에 귀국을 했던 것이다. 조국 해방의 감격은 어린 내 가슴에도 벅찬 기대 속에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찾아온 조국의 품은 어처구니없게도 모든 기대를 허물어뜨렸다.
  몇 년이 못 가서 우리는 10식구가 뿔뿔히 헤어져야 했다.  6·25가 일어나자 가족들은 서로의 생사조차 모르게 되었다.
  1955년 여름, 내가 객지를 전전한 지도 4년째가 되었었다.  부산에서 재봉기상회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교회도 예수님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좌절과 실의에서 헤어나지 못한 사춘기 시절이었다.  그런데 외로운 객지 생활 속에서도 친구는 있었다. 자동차 정비소에서 일하던 오기훈이란 아이와 최명자라는 여자 아이었다.
  명자는 충청도가 고향이었지만, 6·25때 부모님을 잃고 고아원에서 자랐다. 기훈이는 이북피난민이었다.  일찍부터 부모님은 안 계셨고, 형님과 월남을 하다가 헤어진 것이라 했다. 그는 나보다 한 살 위였지만 10년 이상 나이가 더 들어 보였다. 사고력도 행동도 생김새도 의젓했다.
  기훈이와 나는 용돈이 생기면 초량동에 있는 "계몽서점"이란 헌 책방에서 책을 빌어다 보는 것으로 날을 삼았다. 계몽서점은 중앙 국민학교 분교장 앞에 있었다. 주인은 마흔 살이 조금 넘은 마음씨 좋은 분으로, 처음엔 책값만큼의 보증금을 내고 책을 빌어왔지만 나중에는 서로 알게 되어 값비싼 책도 그저 내어 주었다.
  「베르테르의 슬픔」을 빌어다 읽고는 청년 베르테르의 사치한 죽음에 대한 실망으로 분노를 느끼기까지 했다. 대신,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고는 그만 기훈이도 나도 울어 버렸다. 기훈이는 얘기했다.
   "나도 언젠가 라스콜리니코프처럼 도끼로 사람을 때려 죽일지도 몰라. 그땐 소냐처럼 먼 시베리아까지 함께 가줄 연인이나 친구가 있어야 할텐데……."
  기훈이의 말이 아니었어됴 우리는 너무 고독했고, 그래서 따뜻한 이웃이 그리웠던 것이다.
  이 광수의 「단종애사」를 읽고 나서 "사육신"을 존경하게 되었고, 단종의 슬픔이 우리 자신의 슬픔으로 되살아났다.
  상점 유리문에 붙여놓은 극장 포스터권이 나오면, 우리는 삼류 극장에 가서 서부 활극을 구경했다.  잔인한 백인들의 총탄에 죽어 가는 인디언들이 전시(戰時)의 우리들의 입장과 닮은 것 같아 쓸쓸했다. 기훈이와 둘이서 밤길을 걸으면서 '굳세어라 금순아'를 목이 터지도록 불렀다.
  명자는 어디서 구했던지, 찬송가와 성경책을 주면서 간곡히 교회에 나가도록 권유했다.  다행히 명자는 크리스찬이었기 때문에 일요일 교회에만은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나와 기훈이는 입장이 달랐다. 아침 5시에 일어나 저녁 9시까지, 더 늦으면 12시까지 일을 했다. 초량동 삼일 교회당 앞까지는 가봤어도 한 번도 예배엔 참석해 보지 못했다. 그때 명자가 준 군용 찬송가는 아직 내가 보관하고 있다.
  기훈이가 자살을 한 것은 그 해 늦은 여름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식중독으로 죽었다고 말하지만 나는 기훈이의 죽음을 어디까지나 자살로 믿고 있다.
  죽기 며칠 전 아침 기훈이는 신품(新品)이나 거의 같은 몽키스패너 한 개를 가지고 와서 팔아 달라고 했다.
  "수리를 하고 간 차가 빠뜨리고 갔어. 찾으러 올까봐 기다려도 안 오니 우리가 가져도 될 것 같어. 잡지 한 권 값은 될 거야."
  나는 몽키스패너를 150환에 판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기훈이에게 그 돈을 전해 주지 못했다.
  갑자기 나는 넓은 바다 가운데 혼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며칠을 두고 상점 책상에 엎드려 꼬박 밤을 새우며 울었다.
  기훈이와 같이 사서 읽던 월간 잡지 「학원」을 1955년 8월호로 영원히 인연을 끊게 된 것도 기훈이의 죽음 때문이었다. 한 번 쌌던 헌 상품 포장지를 벗겨, 소설도 써보고 시도 써보던 것을 그만 두었다.  계몽 서점에 찾아가는 것도, '굳세어라 금순아', '슈사인 보이'를 부르는 것도 그만두었다.
  명자는 이따금 나를 보면 한숨 섞인 말로 위로를 했다.
  "얼굴이 말이 아니야, 어디 아픈 덴 없니?"
  "응, 나 요즘 자전거 타고 오르막에 오를 땐 숨이 무척 가빠."
  우리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명자가 서울로 떠난 것은 늦가을이었다.  훗날 들리는 소문에 명자는 어느 윤락가에서 웃음을 파는 아가씨로 전락해 버렸다고 했다.
  무척 착한 아이였다. 일요일이면 성경책을 들고 교회당으로 얌전히 걸어가던 명자가 창녀가 되었다. 어쩔 수 없었던 모순투성이 역사와 사회가 낳은 불행한 고아들을 누가 나무랄 수 있단 말인가?
  기훈이와 명자가 모델이 된 동화, "갑돌이와 갑순이'를 읽을 때마다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친구들의 가엾은 운명에 목이 멘다.
  1956년 새해가 왔다. 음력 설날도 거의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고향집 동생에게서 편지가 왔다.
  형, 설날에 올 줄 알고 기다렸는데 올해도 집에 안 오니까 어머니가 만날 울고 계신다. 형이 올까봐떡을 해두고, 설날이 지났는데도 어머니는 막차 올 때면 정거장까지 마중을 간단다. 손님이 다 내리고도 한참 동안 더 서서 기다려 보고 돌아설 때면 나도 눈물이 났어…….
  나는 가끔 몸에 열이 오르고 기침이 났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아프다는 눈치를 보이지 않았다. 자전거를 탄 채 오르막 길을 오를 수 없도록 숨이 찼다. 내려서 끌고, 가다가 다시 탔다. 밤마다 하늘을날아 다니는 꿈을 꾸었다. 밤중에 깨어보면 식은 땀이 흐르고 몹시 갈증이 났다. 냉수를 한 대접씩 떠서 벌컥벌컥 마셨다. 밥맛이 없고, 일을 하다가도 멍하니 잊어 버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무리하면서 나는 1년을 버티었다. 그러나 끝내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 누어 버렸다. 병원 진단 결과는 늑막염에다 폐결핵이 겹쳤다고 했다.
  1957년 2월, 고향에서 어머니가 오셨다. 나는 죄인처럼 끌려 집으로 돌아왔다.
  집을 떠난 지 5년 만이었다.
  남의 집 논 밭 다섯 마지기 소작 농사를 지어 간신히 살고 있는 고향집엔 늙으신 아버지와 동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나 아버지는 온통 주름살투성인 할머니 할아버지로 변해 있었다. 다만 이제 17살의 동생은 아주 건강하게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도 국민 학교를 졸업한 후,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힘겨운 노동을 하고 있었다. 노동하는 것이 나쁘대서가 아니다. 아직은 공부를 하고 배움 길에서 자라야 할 나이에, 평생 노동으로 시달려 온 부모님처럼 고생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던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이었지만 반가와할 수도 없었다. 말없이 우리는 앞으로 닥칠 운명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을 생각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나는 어두운 방 안에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그런데 마을엔 나처럼 객지에서 병을 얻어 돌아와 있는 사람이 많았다. 서울에서 식모살이 하던 성태란 소녀, 앞집 갑덕이는 16살인데 역시 폐결핵으로 기침을 하고 있었다. 군대에서 의병 제대를 하고 돌아온 청관이와 태진이네 아버지도 폐결핵이었다. 14살짜리 옥자도, 배나무집 시집갔던 성난이도 결핵이었고, 나보다 조금 늦게 온 태호도 기관차 조수로 일하다가 폐결핵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줄을 지어 읍내 보건소로 약을 받으러 갔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환자의 수효량 만큼 약이 공급되지 않았다. 차삯을 간신히 구해서 50리길을 찾아가 보면 약이 나오지 않아 허탕을 쳐야 했다. "파스"와 "아이나"를 함께 복용하다가 "아니나"만 나올 때도 있고 "파스"만 나올 적도 있었다. 그것도 저것도 나오지 않아 한두 달씩 건너 뛰기도 했다.  
  개별로 약방에 가서 구입해 먹으라고 했지만 우리는 따로 약을 사서 먹을 형편이 못 되었다. 이렇게 무질서한 투약으로 치료는커녕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우리 중에서 제일 먼저 죽은 것은 그래도 가정 환경이 가장 좋다고 한 태호였다. 21세 한창 피어나는 나이에 몹쓸 병마로 죽은 것이다. 그 다음엔 17살로 죽은 갑덕이었다. 잇달아 태진이네 아버지가 죽었고, 옥자가 죽고, 성태가 죽었다.
  성태는 무척 깔끔한 처녀였다. 빨래터에 갈 때도 남이 안 보는 이른 아침이나 저녁 늦게였다. 죽을 때까지 가사를 돌봤다. 한 번은 내가 찾아갔더니 성태는 베틀에서 베를 짜고 있었다. 장작개비처럼 가늘어진 허리에 부티끈을 졸라매고 바디를 힘겹게 내리치고 있었다.
  "어쩔려고 힘든 베를 짜고 있니?"
   나는 너무도 놀라움에 가까스로 그렇게 물었다.
  "품앗이 베야. 이런 거라도 해야만 마음이 편해."
  희고 푸른 얼굴로 성태는 쓸쓸하게 웃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청태는 가슴에 구멍이 뜷어져 거기서 고름이 쉴새없이 흘렀었다. 들기름을 묻힌 솜으로 그 구멍을 막아가면서 일을 했던 것이다.
  1960년 겨울 성태는 죽었다. 22살이었다.
  그 다음해는 청관이가 죽었다. 청관이는 열 식구가 넘는 대가족의 집안에서 결국 쫓겨나듯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다. 들판 외딴 집에 추운 겨울인데도 불을 지피지 않는 방 안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떨고 있었다. 윗목에는 금이 간 요강이 놓였고 요강 안에는 거품이 덮인 가래와 빨간 오줌 몇 방울이 담겨 있었다. 청관이는 이따금 보건소에서 받아온 "아이나" 1개월분을 한꺼번에 먹어치웠다.
  한시 바삐 죽고 싶은 것이 그의 소원이었다.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그를 마다고 했다. 주림과 추위와 고독과 아픔을 한꺼번에 참아 가기란 너무도 벅차고 가혹한 일이었다. 불쌍한 청관이는 그렇게 죽었다.
  마지막으로 성난이가 3남매 어린 자식들을 남겨 놓고 죽어 버리자, 나 혼자만이 남게 되었다. 그즈음, 나의 병세는 역시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폐결핵에서 신장, 방광 결핵으로 전신 결핵이 되어 갔다.
  소변보기가 어려워졌다. 횟수가 잦아지고 통증이 뒤따랐다. 1시간에 1회였다가 30분마다 보아야 할 만큼 횟수가 늘고, 나중에는 10분, 5분으로 변소에 나들어야 했다. 밤으로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내가 밤마다 괴로워하니 어머니께서도 함께 주무시지 않았다.
  내가 교향집에 돌아온 다음 해, 동생이 대신 집을 나갔다. 어려운 살림을 돕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된다는 것이 동생의 머리 속에 꽉 차 있었다. 그는 강원도로 서울로 다니며 일자리를 찾아 헤메었다.
  나는 집나간 동생과 부모님께 도저히 그 이상 고생을 시켜 드릴 수 없어 차라리 죽어 버리길 바라고 기도했다. 밤마다 교회당에 가서 밤을 지새우며 하느님께 나의 고통을 눈물로 부르짖었다.
  아마 구약성경에 나오는 욥의 모습만큼 참담했을 것이다.
  여름은 그래도 밤을 지새우기가 쉬웠다. 그러나 추운 겨울은 한층 괴로웠다. 추운 마루 바닥에 앉아 있으면 소변은 숨돌릴 사이도 없이 마려워진다. 밤새도록 들락날락거리다 보면 새벽이 온다. 새벽종이 울리면 곧 일어서서 집으로 돌아간다.
  나중에 아예 깡통을 기도하는 옆에다 놓고 밤을 새웠다. 누구에게 들키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을 하자니 기도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다만, "주여", "주여"를 되풀이하다가 보면 어느 사이에 "어이 추워, 어이 추워"로 바뀌어 버린다. 어쩌다가 지쳐 그 자리에 쓰러져 잠이 들면 온통 바지가 젖어 있었다. 젖은 바지는 그대로 빳빳하게 얼어 버렸다.
  버려진 바지를 어머니에게 빨리기가 죄스러워 아직 어두운 새벽에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 손수 바지를 빨았다. 빨면서 나는 울고 있었다. 아무리 참으려고 애써도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훌러 내렸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가 흘린 눈물의 열 곱절 아니, 백 곱절도 넘는 숱한 분량의 눈물을 흘리시고 괴로워하셨다.
  어머니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나름대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뒷꼍 뽕나무 아래서 밤마다 몰래 나가 기도하시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산과 들로 나가서 약초을 캐오시고 메뚜기를 잡아 오셨다. 뱀도 잡아 오시고, 개구리도 잡아 오셨다. 아마 어머니가 잡아 오신 개구리는 수천 마리가 넘었을 것이다.
  벌레 한 마리도 죽이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시며, 생명 가진 것을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시던 어머니가 그 많은 개구리를 어떻게 잡아 껍질을 벗기셨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어머니가 가엾으시다. 동생조차 집을 나가고 없고 어머니께서 내 병치닥거리에 여념이 없자 자연, 농사는 아버지 혼자 지으셔야 했다. 식구들은 모두 한결같이 피골이 상접한 환자처럼 되어 갔다. 나의 모습은 꼭 죽은 송장만큼 보기 흉했을 것이다. 이발관에 갈 수 없어 바리캉을 가지고 손수 머리를 깎았다. 손바닥만한 거울 조각을 앞에 놓고 나는 어느새 머리 깎는 데 익숙해 있었다. 우리 속담엔 "중도 제 머리는 못 깎는다"라는 말이 있지만 나는 내 머리를 내가 깎았다. 25살이 넘을 때까지 나는 까까머리로 지냈다.
  그런데 죽기만을 기다리던 내 병 증세가 뜻밖에도 차츰 호전되고 있었다. 소변횟수가 줄어들었다. 소변 볼 때마다 피고름이 섞여 나오던 통증도 조금 가시어졌다. 누워 있어도 곤란하던 호흡이 점차 안정되어 가고 다리에 힘이 올랐다.
  고향집에 돌아온 지 6년 만인 1963년 나는 교회 학교 교사로 정식 임명되었다.
  그렇다고 완전한 건강을 되찾은 것은 아니었다. 소변은 역시 매시간 보아야 했고, 걸음도 아주 천천히 걸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나는 죽지 않는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철야 기도도 계속해 나갔다. 유일한 읽을거리는 성경책이었다. 신문도, 라디오도, 핵 한 권 빌어 볼 수 없는 산골에서 성경은 나의 마음을 무한히 넓게 깊게 가르치고 일깨워 주었다.
  나는 얼마 동안 행복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도 1년을 지속사지 못하고 커다란 슬픔이 닥쳐오고 말았다.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1964년 늦겨울 어느 날, 어머니는 자리에 누우셨다. 누우시기 전날까지도 어머니는 고개 너머 저수지 공사에 일을 가셨다. 염색한 군용 작업복을 입으시고, 허리를 새끼 끄나불로 묶고 집을 나서시던 그 뒷모습이 아직도 내 눈앞에 아른거릴 때면,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
  자리에 누우신 지 6개월 만에 세상을 뜨셨다. 68세의 할머니가 병든 자식을 위해 숨을 거두시기까지 몸부림치시며 절규하셨을 게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남자들만의 세 식구가 남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가 말이 없었다. 겨울이 지나자 어느 사이에 나의 건강은 또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각혈을 하고 소변횟수가 잦아졌다. 그동안 어머니의 병시중에 과로한 탓이기도 하지만 정신적으로 많은 타격을 받아서 그렇기도 했을 것이다.
  어느 날 밤, 어버지는 몰래 나를 부르셨다. 아버지는 그동안 혼자 고민해 오시던 집안 걱정을 털어 놓으셨다.
  이대로 가다가는 집안이 망해 버리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생이라도 우선 결혼을 시켜 가계를 이어나가야 된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심경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위로 세 분 형님 중 한 분은 일제 말기 때 잃어버리고 두 분 형님마저 소식을 모른 지가 오래이다. 넷째 아들인 내가 병들어 10여 년을 앓고 있으니. 이젠 막내아들에게나마 가계를 잇게 해야만 하는 것을 당연했다.
  아버지는 여기까지 말씀하시고 한동안 침묵해 계시다가 무척 어렵게 입을 여시었다.
  "정생아, 아버지로서 이런 말을 한다는 건 도리가 아니지만, 집안을 생각해서 말하는 것이니, 네가 어디 좀 나가서 있다가 오너라. 한 1년쯤 바람도 쏘이면서……."
  나는 아버지의 뜻을 훤희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아버지가 말씀하시기 전에 내가 먼저 행동했어야만 했다. 나는 앞서 죽어 간 친구들을 생각하면서 살아 남아 있는 것이 저주스러웠다.
  1965년, 부활절을 지낸 며칠 후, 4월 중순이었다. 나는 새벽 일찍 보따리 하나를 들고 집을 나왔다. 잠든 동생의 머리 맡에 쪽지 한 장을 놓아 두었다.
  "나, 어디 좀 나갔다가 올 테니까 아버지 말씀 잘 따르기 바란다. 형."
  새벽 바람은 차가왔다. 기차 시간은 아직도 넉넉하게 남았다. 정거장에 도착하고 나니, 그때애 가까스로 동녘이 트이기 시작했다. 조그만 대합실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한찬 기다리니까, 손님들이 한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1시간 후에 차표를 사서 막 개찰구를 나가려는데, 누군가 헐레벌떡 달려 오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달려오는 청년을 보고 흠칫했다. 너덜너덜 해진 작업복을 입은 동생이었다. 동생은 내게 다가오더니 팔을 잡아당겼다.
  "형, 어디 가는 거야?"
  "걱정하지 말어. 기도원에라도 가서 한 1주일 있다가 돌아올게."
  나는 동생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게 둘러대었다. 그렇지 않아도 전부터 유명한 S기도원에 한 번 각 싶어했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안돼! 형이 어딜 가면 나도 집에 안 있겠어."
  동생은 붙잡은 팔을 놓지 않았다. 나는 한쪽 구석으로 가서 타이르기 시작했다. 1주일만 있다가 꼭 돌아올테니 그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사정을 했다. 동생은 어쩔 수 없음을 깨달았는지 호부머니 속에서 꼬깃꼬깃 접힌 종이 돈 한 장을 내밀었다. 백 원짜리 1장이었다.
   "1주일만 있다가 꼭 와야 해. 꼭!"
   개찰구를 나오다가 돌아다 보니, 동생은 돌아선 채 울고 있었다. 나는 못 본 척 기차에 올라탔다. 애써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느라고 입술을 깨물고는 태연한 척 차장 밖을 내다보며 의자에 앉아 있었다.
  S기도원에 닿은 것은 오후 4시경이었다. 아직 벌거숭이들판에 처녀들이 밀가루 자루 같은 것을 들고 다니며, 이제 막 돋아나는 쑥을 캐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디 사는 처녀들이기에 저토록 많이 나와서 쑥을 캐는 것일까?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기도원으로 가는 산길에접어 들었다. 그때 15세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 내 곁으로 달려왔다.
  "아저씨, 어딜 가세요?"
  소년은 나의 아래위를 훑어 보며 묻는 것이었다.
  "기도원에 오래 계실 거예요?"
  소년은 거듭 물으며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얼마나 있을지 아직 모르겠어."
  "식량이랑, 돈이랑, 준비해 오셨어요?"
   나는 그제서야 소년이 자초지종을 캐어 묻는 까닭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저씨, 돈 갖고 오지 않았음, 기도원에 못 있으실 거예요."
  소년은 혼잣말처럼 불평 비슷하게 말하고는 내가 오던 길로 달려가 버리는 것이었다. 기도원에 가까워지니 쑥을 뜯는 사람은 처녀들만이 아니었다. 할머니도 있고, 남자들도 있었다.
  신분증을 제시하고 50원을 주고 등록증을 받았다. 백원짜리를 내고 거스름을 받으니 거기 서성대던 사람들이 일제히 내 거스름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서야 그 사람들이 등록금 50원이 없어서 풀기 없이 서성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쩐지 그 사람들 보기가 미안했다. 사무실을 나와서 안내해 주는 숙소로 가려고 하는데, 어떤 청년이 양쪽 겨드랑이에 목발을 짚고 서서 역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나는 고개 숙인 청년을 유심히 보았다. 얼굴이 부어 있고 한쪽 다리를 끌다시피 하는 것이 틀림없이 나병 환자였다. 나는 청년에게 가까이 가서 물었다.
  "등록을 못 하셨나요?"
  청년은 나를 쳐다 보더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내 처지보다 더욱 딱한 청년에게 동정이 갔다. 방금 받았던 거스름돈을 주면서 등록을 하라고 했다. 청년은 몇 번 사양을 하더니 받아들고 사무실로 갔다. 나는 기다렸다가 그와 함께 지정된 숙소로 갔다. 판자쪽으로 움집이나 다름없이 지어놓은 딱 한 간짜리 방이었다. 세 사람의 남자가 합숙을 하고 있었다. 나와 문둥이 청년이 들어가자 꺼리는 기색이 완연했다. 저녁식사는 각자가 가지고 온 냄비에 곡식 낟알 한 줌씩 넣고 쑥죽을 끓여서 먹고 있었다. 각기 벽쪽으로 돌아앉아 훌훌 마시듯이 먹어치운다.
  문둥이 청년과 나는 우두커니 앉아 있기가 무엇해서 밖으로 나왔다. 기도원 산비탈엔 저녁 짓는 연기로 꽉 찼다. 모두들 한결같이 쑥죽을 끓이고 있었다. 나는 아까 이리로 올 때, 처녀들과 할머니들이 쑥을 캐던 이유룰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저녁 예배 시간이 되어 우리는 예배당으로 갔다. 석조 건물의 예배당은 꽤나 넓었다. 몇천 명을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밤을 새워 기도를 하면서 예배당 마루에서 지냈다. 다음날 아침엔 기도원 내에 있는 매점에서 고구마를 사서 먹었다. 날고구마를 그대로 문둥이 청년과 같이 씹어먹고는 산비탈 소나무 밑에서 잤다.
  3일째 되던 날, 문둥이 청년은 더 있을 수 없다면서 기도원을 떠나갔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청년은 주저주저하면서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의 손을 꽉 마주 잡고 산 밑까지 전송을 했다. 그가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가는 뒷모습이 산모퉁이로 사라져 버리자 나는 여태까지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리고 말았다. 그 뒤 1주일 동안 기도원에 있었지만, 잠시도 그 문둥이 청년의 모습이 눈앞에서 떠나지 않아 괴로웠다. 차라리 그 청년과 함께 어디든 함께 갔었더라면 하는 뉘우침까지 일어나는 것이었다. 길 잃은 양처럼 떠나간 청년을 생각하니 이 넓은 기도원엔 예수님이 안 계신 것 같았다. 분명히 문둥이 청년을 따라 가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기도원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동안 계속 고구마만 먹으면서 살았지만 이젠 고구마를 살 돈도 없었다. 수중에 남은 돈은 60원 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기도원에 들어와서 꼭 10일 만이었다.
  산을 내려와서 한길에 이르자 나는 어느 쪽으로 갈지 망설여졌다. 나는 고향집이 있는 북녘 하늘을 바라보다가 어느새 발길을 그쪽으로 옮겨 놓았다. 그래도 집쪽으로 가까운 곳으로 가고 싶어진 것이다. 아주 천천히 쉬어가면서 걸었다.
  한나절이 조금 지나자 몹시 배가 고파졌다. 뉘집에 들어가서 점심 요기라도 청해 볼까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나는 어느새 각오가 되어 있었다. 점심 같은 것은 아예 생각조차 말아야 한다. 그리고 구걸을 할 바엔 철저한 거지가 되자고 결심하게 된 것이다.
  나는 수중에 남았던 60원으로 길가 상점에서 두레박용 깡통 하나와 성냥 한 곽을 샀다. 문둥이 청년이 불현듯 보고 싶어졌다. 나는 목발을 짚은 청년을 찾으면서 길을 걸었다.
  그로부터 꼭 3개월 남짓하게, 나의 거지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해 봄은 무척 가뭄이 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신 여름엔 비가 잦았다.
  기도원을 나온 그날 밤부터 나는 아예 노숙(露宿)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철저한 거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 당시의 일들을 새롭게 회상할 수 있는 것으로 시(詩) 몇 편을 가지고 있다. 시라기보다 낙서나 다름없는 지극히 감상적인 글이지만 여기 서너 개만 소개하기로 한다.

내 잠자리밤

안개 깔린
   포플라나무 밑으로
   가랑잎처첨 굴러갔습니다.
   그 날
   갈릴리의 밤은
   저렇게 달려가는 자동차
   헤드라이트의 불빛도
   신호등 불빛도 없었겠지요.
   여우도 굴이 있고
   날아가는 새도 깃들 곳이 있다시던
   그 갈릴리엔
   넓은 하늘 반짝이는 별빛만이
   오늘 밤도 그렇게 반짝입니다.
   사람의 손이 만든
   콩크리크 다리 밑
   오늘 밤은 거기를
   빌어들었습니다.
   주님
   어쩌면 이런 자리에
   누추하게 함께 주무실런지요.

나의 친구

사랑어린 눈으로
   안아 주시면서
   지난 밤은 조금도
   춥지 않았습니다.

거지

거지를 만나
   우리는 하얀 눈으로
   마주 보았습니다.
   서로가
   나를 불행하다 말하기 싫어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삶이란
   처음도 나중도 없는
   어울려 날아가는 티끌같이
   바람이 된 것뿐입니다.
   제마다가 그 바람을 안고
   북으로 남으로 헤어집니다
   어디쯤 날아 갔을까?
   한참 다음에야
   나를 아끼느라 그 거지 생각에
   자꾸만 바람빛이
  흐려왔습니다.

딸기밭

새빨간 딸기밭이
   보였습니다.
   고꾸라지듯 달려가 보니
   딸기밭은 벌써
   거둠이 끝난 다음이었습니다.
   알맹이보다 더 새빨간
   딸기 꼭지들이
   나를 비웃고 있었습니다.
   불효자에겐
   보아스가 룻을 위해 남겨 줬던
   그런 이삭조차 없었습니다.
   건너 산
   바위 벼랑 위로
   흘러가는 구름이 자꾸 눈앞을 어지럽힙니다.
   어머니
   배가 고픕니다.

나는 오랜 세월 병고에 시달려 왔기 때문에 직접 간접으로 사람들에게 많은 신세를 져왔다. 집을 나와 거지 생활을 하던 그 당시도 친절을 베풀어 준 많은 사람들을 잊지 못한다.
   상주 지방, 마을 앞엔 우물이 있고 늙은 소나무가 있는 외딴집 노부부의 정다운 모습을 잊을 수 없어 '복사꽃 외딴집'이란 동화를 썼다. 열흘 동안 매일 아침마다 찾아갔지만 한 번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깡통에 밥을 꾹꾹 눌러 담아 준 점촌 조그만 식당집 아주머니, 가로수 나무 밑에 쓰러져 있을 때 두레박에다 물을 길어 헐레벌떡 달려와 먹여 주시던 그 할머니의 얼굴도, 배삯이 없다니까 그냥 강을 건네 주시던 뱃사공 할아버지도 좀처럼 내 기억에 지워지지 않는 얼굴들이다. 이처럼 곳곳에 마음 착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얼어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즈음 나의 머리에는 죽음이란 생각이 잠시도 떠나지 않았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남에게 내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자취 없이 죽을 수 있을까를 골똘히 생각했다. 오늘 밤엔 꼭 뉘집에서 삽이나 괭이를 빌려 인적이 드문 산 속에서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죽어 버려야지 하고 별렀다. 실제로 나는 몇 번인가 죽을 수 있는 장소를 보아 두기도 했었다. 그러나 밤이 되면 낮에 마음먹은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나의 죽음은 또 다음 날로 미뤄지는 것이었다.
   8월 초순이었다. 나는 어느새 예천 지방에 와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고향에 가까이 와버린 것이다.
   나는 망설였다. 여기서 북으로 바로 가면 영주를 거쳐 강원도로 가게 된다. 대신 동쪽으로 길을 꺾으면, 우리집은 불과 1백리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갑자기 집으로 가고 싶었다. 어느새 나의 머리 속은 집으로 돌아갈 어떤 구실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갑자기 온몸에 불덩이처럼 열이 오르기 걸음을 옮겨놓기 힘들 만큼 아랫배의 국부(局部)가 아프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때부터 나는 부고환결핵(副睾丸結核)을 앓게 된 것이다. 짐작만으로도 열이 40도 정도로 오르내리는 듯했다. 아버지와 동생의 얼굴이 못 견디도록 복 싶었다.
   이튿날 아침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나의 모습은 보통 몰골이 아니었다. 볕에 그으른 살갗은 아무리 씻어도 깨끗해지지 않았다. 그대로 집에 가면 동네 사람들이 어떻게 대할지, 될 수 있으면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냇물에 목욕을 하고 이발도 했다. 돌아가기로 마음먹고 나니 잠기도 지체할 수 없었다.
   그날 집에 도착한 것은 한밤중이었다. 지름길로 가느라고 높은 산을 넘어가면서 부지런히 걸었지만 졍든 몸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
   나는 3개월 만에 정든 사립문을 밀치고 뜰로 들어섰다. 그런데 밤 12시가 지났음직한데, 아버지가 거처하시는 사랑방에 불빛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나는 떨리는 가슴으로 잠시 방문 앞에 서 있다가 가까스로 기척을 하고 문을 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뜻밖에도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 계셨기 때문이다. 동생이 일어나 달려 왔다. 나는 지친 몸을 그대로 가눌 수 없어 쓰러지면서 동생에게,
   "죽, 죽 좀 끓여 줘!"
  했다. 동생은 부엌에 달려 나가더니 멀건 밀가루죽을 쑤어 왔다. 나는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기 때문에 그 밀가루죽을 벌컥벌컥 마시듯이 먹었다.
  아버지는 벽을 붙드시며 일어나 내 손을 잡으셨다.
  "정생아, 잘 돌아왔다."
  아버지는 벽쪽으로 고개를 돌리시더니 소리 없이 우시는 것이었다.
  동생은 내가 그동안 어디 있었느냐고 자초지종을 캐어 물었다. 나는 다만 기도원에 있었다고만 대답했다.
  오늘날까지 나는 이 3개월 동안의 일들을 동생에게나 누님들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었다. 될 수 있는 한, 동기간에도 마음의 부담이 되는 것은 말하지 않고 참아 왔었다.
  사실 그때의 일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여기서도 시 따위로 대충 적어 놓고 많은 얘기를 숨겨 놓았다.
  그러나 나는 이 3개월 동안을 일생에서 가장 보람있었던 인생 체험으로 소중히 마음 속에 남을 것으로 믿고 있다. 예수님의 40일간 금식 기도만큼 나에게 산 교훈을 일깨워 준 기간이기도 했다.
  들판에 앉아서 읽었던 성경은 생생하게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머리로 읽는 성경은 자칫하면 환상에 그치고 말지만 실제로 체험하면서 읽으면 성경의 주인공과 대화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나는 몇 번이나 죽음과의 싸움에서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만났고, 아모스를, 엘리야를, 애굽에 팔려간 요셉을, 그리고 세례 요한을, 사도 바울을 만나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가깝게 나의 주 예수님을 사귈 수 있었던 기간이기도 했다.
  8월의 무더위에도 아버지는 방문을 꼭꼭 당아 놓고 줄곧 꼼짝 않고 누워 계셨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가을에야 이따금 나들이를 하시는 듯하더니 다시 자리에 누우신 뒤, 결국 일어나시지 못하시고 12월에 세상을 뜨셨다.
  사람의 힘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어떤 일을 성취시켜 보려 해도 결국 자연적인 재난이 그것을 막아 버릴 때가 있다. 또한 자연의 조건이 유리하게 이루어져도 인간 스로가 실수를 범하게 되면 역시 허사가 되어 버린다. 결국 하느님의 섭리를 따를 수 밖에 없이 우리 인간은 약하지 않는가?
  1967년 동생이 결혼을 해서 따로 헤어져 갔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나에게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최대의 은혜는 자유로운 몸이었다.
  물론 나는 부모님에게 너무도 불효했었다. 그리고 내 몸으로 이웃에게 봉사하지 못한, 철저하게도 자신의 몸 하나만을 위해 살아왔었다. 그것도 남에게 폐만 끼치면서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나는 어릴 적에 누나들에게 배웠던 동요를 새삼스레 되씹으며, 내가 그 동요의 주인공이 된 기분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우리 집은
   북쪽 나라 먼 산 속
   그 산 속 깊숙이
   오막집 한 채
   철새들과 얘기하며
   살고 있지요.

  정말이지, 나는 누구와 한 마디의 말을 주고 받지 않은 채 하루 해를 보낼 때가 종종 있다. 얘기할 상대가 없다는 것은 너무도 가혹한 일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그 편이 다행일 수도 있다.
   이 세상에는 사람에게 실망을 하여 삭발을 한 후 깊은 산 속 절간으로 가서 은둔 생활하는 스님들도 있다. 결혼을 했다가도 헤어지고, 사람이 싫어서 자살까지 하는 사람도 있지 않는가. 아무리 오래 살아도 백 년을 넘기기 어려운 인생은 너무도 짧다. 이 짧은 기간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나 역시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어릴 적에는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것이 소원이었고 그것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 병이 들어 버렸다. 병든 다음에는 하루하루 속히 건강해지기만 바라면 기다려 왔다. 그러나 그 병마에서도 헤어나지 못한 지금, 나는 모든 것이 숙제로 남게 되었다. 헛된 것만을 좇아왔던 지난 날을 돌이켜보면 역시 허무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역시 살기 때문에 괴롭고 고달픈 것이다.
  몇 해 전에 이 곳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오신 목사님이 돌아가신 뒤 나에게 편지를 보내오셨다.  
  "권 선생님의 생활이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와 꼭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 편지를 읽고 여태까지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과연 그렇다. 나는 부자의 문간에 않아서 얻어 먹는 거지이다.
  분수를 지킬 줄 모르면 그 이상 불행할 수가 없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처지에 알맞게 행동하며 지나친 욕심을 버린다면 타인에게 끼치는 해가 줄어들 것이다.
  나는 그때부터 나사로와 나와의 입장을 함께하며 거기서 벗어나려 하지 않기로 했다. 개들에게 헌 데를 핥이면서, 부자가 먹던 찌꺼기를 얻어 먹던 나사로였지만, 그는 하늘나라를 볼 줄 알았다.
  그래, 그것만이면 족한 것이다. 나는 거지 나사로를 알고부터 세상을 보는 눈을 달리 했다. 천국이라는 것, 행복이라는 것,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여태까지와는 거꾸로 보게 된 것이다.
 내가 5살 때 환상으로 본 그리스도, 십자가의 의미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거듭나는 과정은 아마 이렇게 서서히 이루어지는지도 모른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가장 인간스럽게 사는 것이다. 나는 지금 한 인간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내가 사람답기 위해, 또 한 사람을 찾고 있다. 나는 여지껏 사람을 사랑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여태까지는 내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어했는데, 지금은 반대로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 외로울 만큼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
  아침부터 밤까지, 나의 기도는 그것만으로 줄곧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사람을 찾지 못하고 있다. 사람을 낚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아들은 이 세상에 사람을 낚으러 오신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에는 사람이 없었다. 3년 동안 다니시며 문둥이도 낫게 하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하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까지 살려 주었다. 그런데도 사람은 없었다. 결국 그리스도는 사람을 낚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도 사양치 않으셨다. 그분이 죽은 후 2쳔 년이 지난 지금, 이 땅 위에 과연 얼마만큼의 사람이 살고 있는지 추측하기 어렵다.
  중국의 노신(魯迅)이 쓴 「광인일기」란 소설에 보면 "아직 사람을 잡아 먹지 않는 어린이가 있을지 모른다. 아이들을 구하라……"고 씌어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갈릴리 바닷가에 찾아가셔서 베드로를 향해 세 번이나 거듭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 당신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합니까?"
  예수가 베드로에게 물으신 사랑이란 어떤 사랑일까? 죽음에서 이긴 하느님의 아들이 어째서 그토록 간곡히 사랑을 구했을까? 그 분은 완전히 신으로 돌아간 것인데 어째서 그토록 고독하셨던가?
  한낱 보잘 것 없는 무식한 어부에게 과연 사랑을 받고 싶었을까?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를 사랑하지는 못했다. 내가 필요할 때면 불렀다가 필요 없으면 잊어 버린다.
 그를 믿으면 병을 고칠 수 있기 때문에,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기 때문에 필요했던 것이지 사랑한 건 아니었다.
  베드로가 예수를 따라다닌 것도 나와 흡사한 생각에서였을 게다. 머리에 금관을 쓰고 높은 보좌 위에서 낮고 천한 인간을 다스리는 그리스도는 인간의 사랑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묻은 손으로 모든 영광을 버리고 홀연히 갈릴리 바닷가에 나타나신 예수는 인간의 사랑이 필요했던 것이다. 비록 비천한 고기잡이 베드로 같은 인간에게도 한 사람으로서의 깨끗한 사랑의 피를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닫지 못할 때 우리는 예수의 참 뜻을 모른다. 사랑이 무언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스도는 한 인간으로서 우리 곁에 와 사랑을 구하고 있을 것이다.
  나의 신앙은 이렇게 사람을 찾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단 한 사람이라도 족하다. 사람을 낚아 그를 사랑하면 곧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길이 된다. 피와 피가 통하는 사랑, 그것만이 그리스도와 나와의 사랑인 것이다.
  얼마 전, 나는 일본의 작가 미야자와 겐지가 쓴 '은하 철도의 밤'이란 동화를 읽었다. 주인공 죠반니는 영혼과 육체가 모두 고독한 소년인데 같은 반 친구 캄파네루라를 사랑하고 있다. 캄파네루라는 헷세가 쓴 데미안과 거의 비슷한 소년이다. 어쩌면 작가인 겐지는 이 캄파네루라를 그가 신앙했던 부처님의 모습으로 그렸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예수의 모습을 이 소년을 통해 표현해 보려 했는지도 모른다.
  죠반니와 캄파네루라는 꿈나라에서, 하늘을 나는 기차를 함께 탄다. 캄파네루라와 마주 앉은 죠반니는 더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캄파네루라, 다시 우리 둘만이 함께 했구나,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같이 가줘……."
  죠반니가 꿈에서 깨어났을 때 캄파네루라는 이미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었다. 물에 빠진 소녀 자네리를 건져 준 다음, 자신은 물 속에 잠긴 채 죽어 버린 것이다.
  결국 죠반니는 캄파네루라를 현세에서 잃고 말지만, 그가 죽으므로 말미암아 영원히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를 나는 알고 있다. 견딜 수 없을 만큼의 아픔과 쓰라림이 뒤따른다는 것을 옛 성현들도 말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라면 너무 어려워 도저히 사람을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특히 나와 같은 인간은 생전에 아무도 사랑해 보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