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죽을 먹어도 함께 살자

권정생
 

 그 해, 온 들판이 황모가 들어 보리가 벌겋게 말라 죽어버렸다. 보릿고개를 넘기고 있던 사람들은 망연자실 넋을 잃고 말았다. 기다리던 보리가 이삭이 패기도 전에 말라 죽어버렸으니 그 정황이 어떠했겠는가?
  보리 한 톨 거두지 못했던 그 해, 이곳 안동지방에서만도 굶어죽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먹을 것이 있었던 집도 도무지 먹을 기회가 없었다. 밤낮으로 거지가 몰려드니 밥을 지을 수도 지은 밥도 마음놓고 앉아 먹을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한밤중에라도 밥을 지어 문을 닫아 잠그어 놓고 숨어서 먹고 있으면, 어느새 느닷없이 나타난 거지가 문을 부수고 들어와 밥그릇째 빼앗아 달아났다. 심지어는 입안에 든 음식도 따귀를 내리치고는 튀어나오면 뺏어먹을 만큼 절박했다. 돌아가신 박실 어르신네가 들려준 보리흉년 때의 이야기는 듣기만 해도 무서웠다.
  "……그 해 뒷산 애총(애기무덤)엔 발디딜 틈도 없이 애기들이 죽어갔제."
  어르신네는 마지막 그렇게 이야기를 끝맺었다.
  아랫마을 진수네 할머니가 들려준 또 다른 기근이 든 해의 이야기는 더 끔찍했다. 진수네 할머니가 열여섯 살에 시집와서 이듬해쯤이니 지금부터 70년 전이다. 이곳 중앙고속도로 남안동 톨게이트로 이어지는 진입로 중간쯤 수재개골이란 골짜기 건너편이다. 널찍한 봇도랑 건너 구릉지밭은 햇볕이 잘 드는 양지쪽이어서 다른 어느 밭보다 보리가 빨리 익었다. 이제 보리알이 누릇누릇 알이 들 무렵, 어디선지 수많은 거지떼가 몰려왔다. 굶주린 사람들은 허겁지겁 보리이삭을 따서는 걸신들린 것처럼 비벼 먹었다.
  그러나 빈속에 날보리를, 그것도 껍질째 먹은 사람들은 배를 움켜쥐고 하나 둘씩 나뒹굴었다. 누가 어떻게 손을 볼 사이도 없이 겉보리에 체한 사람들은 그냥 쓰러져 몸부림치다가 죽어버렸다. 할머니 말씀엔 "수백 밍이 넘었으끼구망" 하셨다. 순식간에 보리밭엔 사람들이 죽은 시체가 쌓였다. 근처 마을사람들이 가서 시체를 끌어다 여기저기 산비탈에 묻었지만 대부분 시체는 그냥 그 자리에서 썩어갔다고 했다.
  " 및 해 동안 거게 농사도 못지었제."
  병자년 물난리가 나던 해는 처녀들이 일본으로 만주로 팔려갔다고 했다.
  대호네 할머니가 세 살 때 다섯 살 된 오빠와 남매를 남겨놓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서간도로 떠나갔다. 남매는 외갓집에 더부살이를 하다가 다섯 살 때 술도가집에서 술지개미를 함께 훔쳐먹던 오빠는 누군가가 데리고 갔다. 할머니는 재작년에야 "글쎄 내 성(姓)이 권가가 아니고 김가란다" 하셨다. 칠십 평생 외갓집 성을 따라 권가로만 알고 살았는데, 먼 친척되는 고모님이 이제서야 가르쳐준 것이다. 할머니는 새삼 서러워 우신다. 어릴 적 어쩐 일인지 영문도 모르고 외사촌 형제들 틈새에서 항상 밀려나 구석 쪽에 외롭게 지내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설움이 복받치신다. 서간도로 간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부산인가 어딘가로 양자로 간 오빠 소식도 모른다.
  "지끔이라도 신문에 내보마 오라배라도 찾을 수 없으까?"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게 다 부질없는 일이다.
  구판장 뒷집 상동댁 할머니는 더욱 애절하다. 해방되던 이듬해 스무 세 살 꽃다운 나이로, 징용에 끌려간 남편을 찾아 부산까지는 갔지만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할머니는 하루하루 부두에 나가 들어오는 연락선을 바라보며 기다렸지만 남편은 오지 않았다. 김천동 산비탈에 움막을 짓고 할머니는 먼 먼 바다를 바라보며 24년을 기다렸다. 1970년, 할머니는 더 이상 기다릴 힘이 없어졌다. 할머니는 한쪽 다리마저 다쳐 절룩거리며 고향에 돌아왔다.
  지팡이를 짚고서도 할머니는 걷기가 힘이 든다. 특히 버스를 오르내릴 때는 부들부들 떨며 시간을 끈다. 할머니의 사정 같은 것 알리 없는 운전기사가 신경질적으로 고함을 치면 할머니는 더욱 사는 게 서러워진다. 한번은 윗골쪽에서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가 걸어오시기에 어디 갔다오시는가 물었더니, "빠스에서 더디 내린다고 저어쯤 실고 가서 내리놓잖애……" 하신다. 마을에서 1킬로나 먼 곳까지 끌고 가서 내려놓은 것이다.
  내작년부터 북한에서 가뭄과 물난리로 동포들이 살아가기 어렵다는 소문들 들어왔다. 하지만 그건 맨날 들어온 그 소리가 그 소리로만 여겼다. 6·25 전쟁 이후 우리는 귀가 따갑도록 북한동포들의 참상을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가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해마다 농사지은 건 당에서 다 빼앗아 가고, 한 식구끼리도 서로 감시하며 감옥 아닌 감옥살이를 한다고, 교과서에서, 동화책에서, 라디오의 김삿갓 북한방랑기에서, 유치원에서, 중학교 고등학교 웅변대회에서 "때려잡자, 김ОО!" 이렇게 자나깨나 들어온 소리다. 그래서 우리는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처럼 어떤 소리도 북한소식은 믿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런데 정작, 요즘 들려오는 소식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배고픈 아이들이 떠돌아다니다가 어느 기차역에서 50명이 얼어죽었고, 두만강가에다 거적에 싸서 버린 아이들의 시체가 줄을 잇고, 처녀들이 백만 원에 중국사람에게 팔려가고,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질러 곡식을 훔쳐가고, 심지어 사람고기까지 먹는 끔찍한 일도 일어난단다. 올 여름까지6백 만에서 8백만이 굶어죽을 위기에까지 왔다고 한다. 8백만이면 북한주민 3분의 1이 죽는다는 말이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것일까? 어버이 수령님의 보살핌으로 세상에서 부러움 없이 살아가는 나라라고 큰소리치던 것이 모두 거짓말이었던가? 정말 기가 막힐 일이지 않는가.
  너무도 오랜 세월 우리는 남의 나라 침략에 시달리고, 가뭄과 홍수에 시달리며 고통스럽게 살아왔다. 하지만 지나간 시절의 고생은 돌이킬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분단과 6·25전쟁까지는 그래도 외세에 의한 고통이라 말할 수 있지만 지금은 절대 아니다.
  온 세상 지구 반대쪽까지 비행기를 타고 갈 수 있고, 팩스가 통하고, 전화통화를 할 수 있는 세상에, 한 땅덩어리 안에서 굶어 죽어 가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던 건 부끄러움을 넘어 죄악이다.
  천만 이산가족은 바로 부모 형제인 직계가족들이다. 차를 타면 몇 십분 몇 시간이면 갈 수 있는곳에 우리는 50년이 넘도록 서로의 소식도 모르고 살아왔다. 사람이 떼죽음을 당하고 있어도 그게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의심하게 된 이상한 나라로 살았다.
  대체 어떻게 해야만 될까?
  아직도 장벽은 두껍게 막혀있고 전화도 안 통하고 편지도 못한다. 제발 당장 통일은 못하더라도 서신연락이라도 주고 받게 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얼마간 휴전선 한 귀퉁이라도 뚫어 굶어죽는 동포에게 밀가루라도 강냉이라도 보낼 수 있게 해야 한다.
  우리가 가진 것으로 조금씩만 나눠 보내면 올 여름 햇강냉이가 나면 굶어죽지는 않을 것 아닌가. 하루 한끼씩 죽을 쑤어 먹더라도 한줌씩의 쌀을 보내 앞으로 몇 개월만 함께 고생을 하자. 비록 얼굴은 마주 보지 못해도 함께 나눠 준 쌀과 밀가루로 우리 한 겨레 한 동포라는 걸 확인하면서 살자. 그래서 이 땅에 다시는 한스러운 역사를 남기지 말자.(《녹색평론》제34호, 1997년 5-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