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곳에서의 흐느낌

김상욱

1.
얼마 전 출판사에서 책을 한 권 보내 왔다. 새로 나온 {몽실언니}였다. 원래 공짜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래서 머리도 약간씩 벗겨져 가고 있는 중이지만, 나는 정말 좋았다. 책 크기도 맞춤했고, 오래 지니기에 좋도록 장정도 단단했다. 섬세한 칼끝으로 새긴 이철수의 채색판화도 산뜻하게 다가 왔다. 크기가 줄어드니까 선명함과 밀도가 그만큼 돋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책 날개에 올려져 있던 권정생 선생의 사진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저 얼굴만 있는 저자의 사진이 아니라 그 인물이 살아가는 모습 한 자락을 딱 붙잡고 있는 사진 말이다.
  사진 속, 문고리 달린 여닫이 방문 앞 댓돌 아래에는 스테인레스 개밥 그릇이 외따로 놓여 있고, 탁자 위에는 부엌 살림이 올려져 있다. 바가지며 반찬통이 위태롭게 동개져 있는 것으로 혼자 견디는 살림의 쓸쓸함을 엿보게도 해 준다. 뒤편으로는 신라면이라도 막 끓여 드셨는지 뚜껑이 달아나고 없는 냄비가 김치통 위에 놓여 있다. 선생은 그 모든 것들이 올라가 있는 평상 앞에 걸터 앉아 있다. 다리를 엉거주춤 벌리고 한쪽 손은 어디다 둘지 몰라 어정쩡하니 들어올리고, 또 다른 손으로는 강아지를 쓰다듬고 있다. 선생의 검정 고무신에 삐쭘하니 드러나는 발은 시린 맨발이다. 입을 꾹 다물고, 순한 얼굴로 망연하게 앞을 내다보며 앉아 있다. 우리 시대의 가장 뛰어난 동화 작가라기보다 그저 심심한 시골 노인의 모습이다. 다만 선입견 탓인지 얼굴이 맑고 단아하게 느껴질 뿐.
  그런데 조촐한 한 노인을 담고 있는 그 흑백 사진 앞에서 나는 자꾸만 숙연해졌다. 요즘과 같은 자본의 시대, 소비의 시대, 상품의 시대에 맞서는 가장 단단한 삶이 바로 이런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본의 위력이 기승을 부릴수록, 자본의 첨병인 상품과 마주치는 기회를 최소한으로 줄여나가는 삶이야말로 인간다운 품격을 지켜나가는 삶일 것이다. 얼마 전 읽은 임길택의 시에서처럼 '― 없는 대로/ ―불편한 대로'([부엌], {똥 누고 가는 새}) 살아가며, 선생은 묵묵히 한 시대를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흑백 사진 속에 담긴 소박한 선생의 삶에 비할 때 부잡스러운 욕망에 끝없이 뒤척이고, 조금만 부족해도 그예 참지 못하고 채우고야 직성이 풀리는 나의 생은 얼마나 가소로운 것인지. 새삼 이름 없이 가난하게 사는 모든 삶이 그리워진다.
  이미 모두에게 알려졌으나 여전히 그 이름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난하게 살고 있는 선생의 삶은, 사진 밑 작은 활자로 짧게 쓰인 소개의 글에도 고스란히 배어 있다.
  1937년 일본 토오꾜오에서 태어나 해방 직후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1969년 기독교 아동문학상에 [강아지똥]이,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당선되었고, 1975년 제 1회 한국아동문학상을 받았다. 1967년 경북 안동 일직면 조탑동에 정착해 마을교회의 종지기 생활을 하였고, 80년대 초부터는 교회 뒤 빌뱅이 언덕 밑에 작은 흙집을 지어 살고 있다.
  37년 생이니 선생은 올해로 예순 다섯. 처녀작을 발표한 것은 나이 서른 셋이며, 그 즈음부터 줄곧 안동의 시골마을에서 교회 종지기로 지내며, 작은 흙집을 지어 살고 있다는 설명이다. 선생은 첫 작품인 [강아지똥]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장 최근에 나온 [비나리 달이네 집](낮은산)에 이르기까지 쉼없이 뛰어난 작품을 창작함으로써 예술적인 측면에서도 그 결곡한 가난함에 뒤지지 않는다. 그는 참으로 소중한 우리 시대의 작가가 아닐 수 없다.

2.
  익히 알고 있듯이 선생이 작가로 몸을 세운 작품은 [강아지똥]이다. 이 작품은 조그만 강아지가 누고 간 똥인 '강아지똥'을 주인공으로 삼아,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마침내 거름이 되어 빛나는 민들레 꽃을 피워나간다는 것을 줄거리를 담고 있다. 주제 자체는 그다지 새로울 바가 없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등등 삶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벽을 떠받치고 있는 모퉁이돌의 소중함을 어찌 모르는 이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 작품을 읽노라면 모르는 사이에 눈시울이 뜨근해 지는 감동을 받는다. 요즘도 나는 수업 중에 함께 읽다가도 마지막 장면에서는 굳이 학생들을 시켜 읽게 한다. 그리고 서둘러 뒤로 돌아가서 붉어진 눈가를 매만진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감동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돌이네 흰둥이가 누고 간 똥입니다. 흰둥이는 아직 어린 강아지였기 때문에 강아지똥이 되겠습니다. 골목길 담 밑 구석자리였습니다. 바로 앞으로 소달구지 바퀴 자국이 나 있습니다.
추운 겨울, 서리가 하얗게 내린 아침이어서 모락모락 오르던 김이 금방 식어 버렸습니다. 강아지똥은 오들오들 추워집니다.

  작품의 첫부분이다. 전반적인 배경을 몇몇 문장만으로 간략하게, 또 빠르게 처리하고 있다. 짧은 배경의 소개에 이어 곧장 인물이 제시되기까지 거침없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불필요한 구석 어디 하나 없이 잘 정선된 어휘들이 연결되어 어린이문학의 표현 형식이 어떠해야 할지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강아지똥이 되겠습니다.'라는 부분에서는 쿡하고 웃음이 나올 만큼 해학적이다. 이 짧은 인용 속에서도 권정생 작품의 문체적 특성을 음미하기에는 충분하다.
  첫부분뿐만 아니라 작품 전체에 걸친 풍부하고 생동하는 표현은 붙잡을 수 없을 만큼 많다. 풍부하게 드러나는 시늉말은 인물의 모습을 생생하게 의인화하여 표현하고 있으며, 문장과 문장을 이어가는 것도 동어반복없이 풍부하게 채워가고 있다. 대화를 이어가는 기능적 표현의 다채로움만 추려 보아도 알 수 있다. 선생의 작품 속에는 대화에 이어지는 '말했습니다'라는 표현을 찾기가 어렵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다채로운 만큼 장면 제시의 대화를 중심으로 엮어감으로써 사건 진행의 서술이 갖는 딱딱함을 극복해가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덧붙여 이들 다양한 문체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글 자체는 소박하고 단순한 표현으로 작가의 생각을 최대한 억제하고 있다는 점도 미덕이다.
  새삼 말할 것도 없지만 동화는 표현이 단순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요건이다. 가능한 한 문장의 길이는 짧아야 하며, 구체적이고 선명한 어휘를 구사해야 하고, 묘사보다는 서술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요건들이 반드시 작품 속에서 지켜져야 할 필요는 없다. 무릇 문학작품이란 정해진 틀이 앞질러 존재하고 그에 맞추려고 드는 순간, 이미 예술로서의 품격에는 금이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들이 독자들을 작품 속에 끌어당기는 매혹적인 지렛대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다시금 생각해 볼 때, 동화의 표현 형식이 단순하다는 것은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 이 단순성은 어린 아이들이 그저 쓴 글처럼 단순한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작품에서 표현되는 단순성은 삶의 복합성을 에둘러 온 단순성이다. 삶의 복잡다단한 연관을 꼭꼭 다져 정련시켜 획득해 낸 것이기에 삶의 본질적인 표정을 놓치지 않고 있는 단순성인 것이다. 복잡한 현상을 이리저리 깎아내서 만들어낸 단순한 형상이 아니라, 그 현상의 이면에 놓인 소박한 본질을 새로운 질료로 형상화한 것이다. 예컨대 청동으로 잘 빚어진 미륵반가사유상이 백제 예술의 정점이라면, 입꼬리를 올린 채 빙긋이 웃고 서 있는 서산의 마애삼존석불은 고귀한 단순성의 실체로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이들 두 불상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저마다의 세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견줄 때 어린이문학의 단순성 역시 복잡한 것을 단순화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단순하면서도 삶의 복합성을 끌어안고 있는 단순성임을 알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강아지똥]은 우리 어린이문학이 획득해야 할 단순성의 진정한 의미에 가장 근접해 있는 표현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전체적인 구성이란 관점에서도 작품은 탄탄하다. 강아지똥은 태어나면서부터 "똥, 똥, 똥…. 에그, 더러워!"란 말을 들으며,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알게 된다. 그리고 흙덩이를 만나 다시금 "똥 중에서 제일 더러운 개똥"임을 확인하며, "하느님은 쓸데없는 물건은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어. 너도 꼭 무엇엔가 귀하게 쓰일 거야"라는 말을 마음 깊이 새겨두게 된다. 이를 통해 강아지똥은 새로운 존재로 거듭 날 개연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흙덩이가 가 버린 다음에도 강아지똥에게는 달라진 것이 없다. 새 봄이 왔으나 여전히 병아리와 암탉으로부터 멸시를 받는다. 그러나 '점심으로 나를 먹어' 달라고 요청함으로써 희생의 모티프를 새로이 얻게 된다. 그리고 절정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아름다운 별빛'을 통해 동경의 대상을 구체화하고, 마지막에는 민들레를 통해 별빛이 갖는 이미지를 중첩시켜 결말에 이르고 있다. 구성의 과정 역시 의미를 점층적으로 확장 심화해 가면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 상승시켜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표현의 특성이나 구성의 단단함들이 권정생 문학의 본질일 수는 없다. 권정생 문학의 본질은 당연히 형식이 아닌 내용에서 찾아야 한다.
  강아지똥은 온몸에 비를 맞아 자디잘게 부서졌습니다. 그리고 땅 속으로 모두 스며들어가 민들레의 뿌리로 모여들었습니다. 줄기를 타고 올라와 꽃봉오리를 맺었습니다.
  봄이 한창인 어느 날, 민들레는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웠습니다. 샛노랗게 햇빛을 받고 별처럼 반짝이었습니다. 향긋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갔습니다. 방긋방긋 웃는 꽃송이엔 귀여운 강아지똥의 눈물겨운 사랑이 가득 어려 있었습니다.
  이 인용은 [강아지똥]의 마지막 부분이며, 주제가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눈물겨운 사랑'으로 포착된 주제는 기실 스스로의 희생을 통해 새롭게 부활하는 영혼의 아름다움이다. 더욱이 이 부활은 '아무 데도 쓸 수 없는 찌꺼기'로부터 비롯된다. 현실 속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존재들, 가장 핍박받는 존재들이 어김없이 그의 작품의 주인공인 것도 여기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궁핍한 시대일수록 가난한 존재들만이 생명의 참된 결을 제 몸 속에 새겨두고 있기 때문이다.

  거지가 글을 썼습니다. 전쟁 마당이 되어 버린 세상에서 얻어먹기란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어찌나 배고프고 목말라 지쳐 버린 끝에 참다 못해 터뜨린 울음소리가 글이 되었으니 글다운 글이 못 됩니다. … 부자의 문 밖에서 얻어먹던 거지 나사로가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것은 분명히 자기는 가장 불쌍한 거지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잘 먹고, 잘 입고 살던 부자는, 오만스럽게도 자신이 거지임을 깨달을 줄 몰랐기 때문에 영원한 불구덩이 속에서 괴로운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강아지똥}, 세종문화사, 2쪽)

권정생은 스스로를 가장 낮은 곳으로 유폐시킬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도 가장 낮은 곳에서 선택한다. 다만 그저 낮은 곳에 기거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가장 낮은 존재임을 오롯이 깨닫고 있는 인물들을 선택한다. 그리고 이 인물들의 '울음소리'를 자신의 작품 속에 담아나가고 있는 것이다. 작품 속에서 이 인물들은 '참다 못해' 울음을 터뜨리지만, 정작 울음소리는 터져나오는 울음소리가 아니라 안으로 깊이 움츠려드는 울음이다. 권정생 작품 특유의 울음이 가장 선명하게 형상화된 작품은 {사과나무밭 달님}(창작과비평사, 1978)에 실린 편편들이다. 앉은뱅이 탑이 아주머니, 마흔이 가까웠는데도 장가를 못간 필준이와 그의 실성한 어머니 안강댁, 마침내 팔려가는 소, 일본에서 품팔이로 쓰레기를 치는 공아저씨, 작은 키에 코가 탱자처럼 생긴 똬리골댁, 남의 집 머슴으로 살다 고운 소근네를 만나 혼인하여 아들딸을 낳지만 결국 문둥병에 걸려 집을 나가고 마는 해룡이 들이 그러하다.
  집을 떠난 해룡은 10년이 지난 눈 내리는 겨울 밤, 거지의 행색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가족을 만나지도 못한 채 신발만 어루만지다 눈 속에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고는 돌아서 간다. 이 장면은 권정생 특유의 섬세한 묘사 속에 사람들의 마음 속 뜨거움을 고즈넉하게 불러내고 있다.
  뒤란에는 나뭇가리가 해룡이 집을 떠날 때 있었던 그 모습 그대로 두 무더기가 쌓여 있습니다. 변한 것은 방문 앞의 신발들의 크기였습니다. 그것이 10년이란 긴 세월이 흐른 것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소근네, 고마워. 정말 고마워.'
  거지는 방문 앞으로 다시 숨죽이며 다가갔습니다. 소근네의 신발을 쓰다듬어 보고 옥이의 신발을 만져 보았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 품속에서 무언가 꺼내어 방문 앞에 놓아 두었습니다. 잠시 서 있던 거지는 다시 사랑방 문 앞으로 갔습니다. 문고리를 쓰다듬었습니다. 힘껏 그러쥐었다가는 힘없이 놓았습니다. 그대로 엎드려 만석이와 천석이의 고무신에 손을 집어 넣었다가는 일어섰습니다.조용조용 걸어서 사립문께로 나갔습니다. 사립문을 나간 거지는 다시 뒤돌아보았습니다. 그러고는 골목길로 사라졌습니다.({사과나무밭 달님}, 창작과비평사, 159-160쪽)

해룡이 가족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것은 고작해야 신발들뿐이다. 아내 소근네의 신발을 쓰다듬고, 옥이의 신발을 만져보고, 두 아들의 신발에 손을 집어 넣어보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행동의 내부에 묻어나는 마음의 고통과 생각의 격랑이 남김없이 스며들어오는 느낌을 받는다. 권정생은 이 인물들의 작은 움직임 속에 큰 고통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고통은 때로는 공아저씨처럼 역사적인 고통과 맞물려 있기도 하지만 해룡의 경우처럼 천형이라고 일컫는 질병으로부터 비롯된 존재론적인 고통인 경우도 있다. 원종찬은 권정생의 작품을 조탑마을 이전과 이후로 나누고 '개인사적 체험'과 '민중사적 체험'으로 경개를 그려 보이고 있지만([속죄양 권정생(2)], {어린이문학} 2000.12월호, 23쪽), 정작 작품의 실제는 선명한 구획을 방해하고 있다. 현실을 배면에 두고 있는 민중적 삶의 설움과 고통은 아직은 명료한 원인을 찾지 못한 채, 울음을 안으로 삼키며 저물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인물들의 울음을 받아줄 존재 역시, 사람이 아닌 초월적인 존재였기에 울음은 울부짖음이 아니라 흐느낌으로만 안으로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이다.

3.
  권정생의 작품들이 민중적 삶의 도처에 흩어진 울음을 토해내는 것이라고 해서, 그의 문학이 비극적인 것은 아니다. 그는 민중적 삶 그 자체 속에서 이미 비극을 극복할 동력을 찾아내고 있다. [해룡이]의 경우 가족들을 위해 기꺼이 집을 떠나고, 십 년에 걸쳐 애써 모은 돈을 문 앞에 놓아 두고, 또 아쉬움 속에서 돌아서는 행위는 인간의 진정성을 고스란히 증명해 보이고 있다. 마음 속의 생각과 느낌이 깊이깊이 영글대로 영글어 온몸으로 가족에 대한 사랑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권정생 작품에 담긴 현실이 지극히 비극적임에도 불구하고, 하여 자칫 소재에 짓눌려 미적 아름다움이 훼손될 여지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감동과 아름다움을 지닌 것은 전언을 명확하게 언표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교훈을 언어로 제시하기보다 인간의 삶, 인물의 성격을 통해 표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성의 급박함과 거칠음을 극복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희망의 전언을 결말 속에 서둘러 제시하기보다 인물이 어떠한 가치를 선택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또 그 가치선택과 행동의 이면에 어떠한 마음들이 떠올랐다 가라앉는지를 보여줌으로써 희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린이문학이 어른들의 문학과 다른 점은 세 가지 계기들 때문이다. 교훈성과 낭만성, 현실성이 어린이문학의 내적 특성으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어른들의 문학은 다만 미적이기만 하면 된다. 치열한 미학적 성취만이 작품의 완결성을 판단하는 유일한 척도이다. 그러나 어린이문학은 다르다. 어린이문학은 독자가 어린이라는 그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훈적이어야 하며, 또 낭만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자칫 교훈성이 지나칠 경우, 낭만성이 지나칠 경우 교훈주의나 동심주의로 참담하게 전락하고 만다. 이들 교훈성과 낭만성이 천박해지지 않도록 적절하게 조정해 나가고, 그 적합성을 살려나가는 것은 현실성과 맺고 있는 관련들 때문이다. 교훈이 지나친 나머지 현실성이 없다거나, 지나치게 낭만적인 나머지 현실성이 없다는 비판은 바로 이들 결함들을 지적하는 말임과 동시에 이 세 가지 계기의 관계를 밝히는 지적이기도 하다.
  이들 세 가지 계기를 적절하게 관계 맺기 위해서는 계몽성과 낭만성이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계몽성은 교과서적인 가르침이라는 좁은 의미를 넘어 한층 폭넓은 의미역을 가져야 하며, 낭만성은 그 반대로 무엇이나 긍정적인 측면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엄격하게 제한된 의미역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이들 미적 범주들이 적절히 조율될 때, 좋은 어린이문학 작품이 솟아나는 것이다. 좋은 동화란 현실성, 계몽성, 낭만성이 삼각뿔의 밑변을 형성하는 꼭지점으로 존재하며, 그 꼭지점이 나란히 밀어올리는 뿔의 높이가 작품의 예술적 높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니,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서로를 팽팽하게 당겨 삼각뿔의 높이를 최대한 낮출 때 좋은 작품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는 [강아지똥]은 적어도 팬터지적인 작품이라는 점에서, 하여 마침내 강아지똥이 민들레 꽃을 피우는 희망에 가득찬 주제라는 점에서 낭만적이다. 또한 모든 살아있는 것이 저마다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그 가치는 눈물겹게 헌신적인 사랑을 통해 회복된다는 점에서 계몽적이다. 또한 강아지똥이 가장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현실성의 계기들 또한 미약하지 않다. 그렇지만 이들 세 계기들이 이루는 삼각뿔의 모양은 현저하게 계몽의 편으로 기울어져 있다. 기독교적인 주제 의식이 선명하게 드러난 나머지 다른 여타의 계기들과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지 못한 편이다.
  이에 비할 때, [해룡이]를 비롯한 {사과나무밭 달님}에 수록된 작품들은 대체로 이 주제의식이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정교한 균형감각을 지닌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물론 [강아지똥]과 [해룡이]의 차이가 동화와 소년소설의 차이일 수도 있다. 고학년을 대상으로 한 소년소설의 경우는 주제를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되고, 동화의 경우는 어쩔 수 없이 표면에 제시해야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권정생이 최근에 쓴 [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우리교육, 2001)는 이 분류에 따르자면 분명 동화임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계몽성을 극복해 보이고 있다.
  이 작품에서 너구리의 엄마는 옷을 기워 입으면 꽃이 더욱 아름다워지고, 하늘이 더욱 맑아진다고 말하며, 또야의 옷을 기워 입힌다. 또야는 새옷을 입고 싶었지만, 엄마의 말에 솔깃하여 기운 옷을 입고 유치원 선생님에게 가 자랑을 한다. 한동안 갸우뚱거리던 선생님은 환하게 웃으며 엄마 말이 옳다고 맞장구를 친다. 이 작품 속에 경험으로 포착된 현실성은 환경오염이다.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며, 작품이 길어내고자 하는 주제 의식은 생각보다 심오하다. 그러나 이 작품의 미덕은 주제의식의 깊이 자체에 있다기보다, 기운 옷을 입는 것이 환경을 지키는 일임을 어느 누구도 명시적으로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교육적 자질들을 최대한 은폐함으로써 헐벗은 계몽성을 극복하고 있으며, 그렇다고 계몽적인 끈 그 자체를 놓치고 있지는 않다. 여기에 덧붙여 너구리라는 알레고리적인 구도를 통해 환상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우의적인 상황의 설정은 현실 속에서는 이미 잊혀진 관습들이란 점에서 오히려 현실성을 더욱 강화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있는 그대로 아이들의 생활 속에서 옷을 기워 입히는 것은 오히려 더욱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낭만적인 계기와 현실성이 마주칠 수 있는 지점도 바로 이곳에 있는 것이다. 이들 세 계기는 이 작품 속에서 서로를 깊이 끌어당기지 않고, 먼 곳에서 잔뜩 끌어당김으로써 팽팽한 긴장을 획득하고 있다. 곧 삼각뿔의 꼭지점을 최대로 밑으로 당겨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 어린이문학에서 삼각뿔의 꼭지점을 가장 최대치로 낮게 내려잡은 작품은, 현실성, 계몽성, 낭만성의 밑면을 가장 균형있고 폭 넓게 펼쳐놓은 작품은 당연히 {몽실 언니}이다. {몽실 언니}의 현실성은 해방 직후, 또 한국전쟁을 거쳐오는 전민족의 역사적 현실성이 과감없이 표현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에는 극심한 생의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놓치지 않는 낙관적 전망으로 충만해 있다. 나아가 이 작품은 몽실 언니란 인물 형상을 창조함으로써 무엇이 아름다운 삶인지를 넓은 자장 속에서 펼쳐보이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들 계기들이 서로 어우러져 일구어내는 명료한 평가보다 {몽실 언니}가 뛰어난 작품인 것은 오히려 어느 한 편으로 규정하기 힘든 복합성을 내부 깊숙이 끌어안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권정생은 자신의 동화를 말하는 자리에서, "나의 동화는 슬프다. 그러나 절대 절망적인 것은 없다."({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 종로서적, 155쪽)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과연 {몽실 언니}는 희망적인가라고 물을 때, 대답이 쉽지만은 않다. 몽실 언니는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고, 열어나가며, 주변의 모든 버림받은 이들을 끌어 안고 있지만, 비관주의적인 느낌을 완전히 떨치지 못하게끔 만든다. 그것은 몽실 언니의 삶의 역정이 마음의 넉넉함을 언제나 무겁게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결코 떨쳐낼 수 없는 마지막 장면의 비극적인 음영 때문이기도 하다.

난남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대로 현관문 기둥에 기대어 서서 몽실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절뚝거리며 걸을 때마다 몽실은 온몸이 기우뚱기우뚱했다. 그렇게 위태로운 걸음으로 몽실은 여태까지 걸어온 것이다. 불쌍한 동생들을 등에 업고 가파르고 메마른 고갯길을 넘고 또 넘어온 몽실이였다. (……)
  난남은 몽실이 절뚝거리며 걸어서 황톳길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까지 서 있었다. 이윽고 몽실이 그 산모퉁이를 돌아가고 가랑잎들이 황톳길에 뒹굴며 남았다.
  난남은 현관문 기둥을 붙잡았다. 뜨거운 눈물이 그제서야 볼을 타고 내려왔다.
  "언니 …… 몽실 언니……"
  난남은 입속말로 기도처럼 불러보았다.({몽실 언니}, 창작과비평사, 253쪽)

동화의 제일 마지막 장면이다. 이 장면은 원종찬의 표현을 빌면 유일하게 '비껴 서술한 맨 마지막 장면'이다. 화자의 위치를 비로소 타자의 눈, 난남의 눈으로 설정함으로써 몽실의 내면을 벗어나 객관적으로 몽실을 볼 수 있게 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작품 전편에 걸쳐 거의 압도적이다. 난남의 마음은 거의 독자의 마음결이기도 하다. 그것은 슬픔일까 기쁨일까?
  이러한 중층성,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어느 한 편에 쉽게 몸을 담그지 못하는 복합성이야말로 권정생 문학의 본질이며, 그의 문학이 갖는 예술적 품격의 본질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권정생 문학의 대부분은 이러한 양상을 갖는다. 가장 최근작인 [비나리 달이네 집](낮은산)에서도 이러한 양상은 나타난다. 이 팬터지적 작품에서 권정생은 마지막 장면을 달이란 강아지의 환상을 통해 건강한 네 다리로 들판을 뛰어 다니는 것으로 낙관적으로 끝맺고 있다. 그러나 낙관적 전망은 환상 속에서 가능했을 뿐, 작품의 서사 행정 그 자체는 전적으로 비관적이다. 또 다른 인물인 신부님은 '사람들은 아무리 가르치고 타일러도 하나도 착해지지 않'(32)아, 성스러운 교회조차 등지고 거짓없는 농사꾼의 삶을 선택한다. 그에 비할 때 짐승에 불과한 달이는 '마치 어느 절 집 스님 같기도 하고, 옛날 옛날 훌륭한 도사님 같기도 하고, 때로는 예수님 같기도 한'(29) 존재인 것이다. 그런 존재인 달이는 사람이 쳐둔 덫에 한쪽 다리를 잃고 만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희망을 전하고 있는가 깊은 절망을 표현하고 있는가? 우리는 어느 누구도 쉽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이 깊고 고즈넉한 울림이야말로 어린이문학이 어른들의 문학보다 오래도록 감동을 안겨주는 실체인 것이다.

4.
  이 글을 쓰는 동안 권정생 작품의 대강을 빠르게 일별하였다.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고통스러웠다. {몽실 언니}를 읽으면서는 몽실이 다리가 부러지는 대목에서는 나는 책장을 덮어버렸다. 더 이상 읽고 싶지가 않았다.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나는 교묘하게 그 대목을 넘겨 읽었다. 이 다음에 본격적인 글로 이 고통과 아름다움의 실체를 더 한층 명확하게 밝히고, 또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나는 권정생 선생의 사진을 배경 음악인 듯 떠올렸다. 그런데 옮길 수 없는 사진보다 선생을 향한 내 마음, 아니 우리 모두의 마음을 잘 담은 글이 있어 대신 전한다. 얼마 전 권정생 작품의 한 축을 너끈히 이어받고 있으며, {문제아}(창작과비평사)로 어린이문학 작가의 반열에 성큼 오른, 젊디젊은 박기범의 글이다. 이 글에는 박기범이, 권정생 선생이, 또 어린이문학의 주변에서 서성이는 우리 모두의 마음이 빼곡하니 들어차 있다.  

지난 토요일. 안동 조탑마을 선생님 댁. 얼마나 떨렸나 모른다. 떨며 떨며 선생님께 겨우 건넨 한 마디는
  "선생님, 얼굴 정말 뽀얘요. 고와요."
  선생님은 어이구 하면서 무슨 말을 그렇게 애기같이 하느냐며 웃었다. 아직도 어린 애 같다고, 우리 같은 때에 전쟁 겪고 살았으면 그래서 어떻게 살았겠냐며. 선생님 얼굴 환했다.
  자꾸만 선생님을 만져보고 싶었다. 선생님 얼굴에 내 얼굴 대어보고 싶고, 선생님을 가만 안아보고 싶었다. 안동 시내로 나가려 일어설 때 두근두근 마음을 다잡았다. 온 마음은 선생님을 한 번 꼬옥 껴안아봐야지 하는 생각만 가득. 그렇게 때만 살피며 머뭇거렸지만 끝내 그러지는 못했다.
  안동으로 차를 타고 나가는 길. 선생님과 나란히 뒷자리에 앉았다. 부끄럽고, 수줍어 쭈뼛쭈뼛. 그러다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지금 너무 너무 떨린다고, 어느 예쁜 여자 옆에 앉아 있는 것 같다고, 그래서 어쩌지 못하고 속으로는 손 한 번 잡아 봐야지 하면서 두근두근 한다고 말이다. 선생님은 웃고, 나는 얼굴이 빨개지고. 선생님은 내 손을 가만 잡아주면서 웃는 말을 하셨다. 요즘은 남자끼리 그러면 안됩니더. 하지만 잠깐 손을 잡아주고는 다시 제 자리. 나는 그 차안에서 어떻게 하면 선생님 손을 더 잡아보나 하고 눈치만 살폈다. 속마음 감추고 있으니까 더 떨리기만 했다.([권정생 선생님 만나고 온 자랑], {굴렁쇠 신문} 2001. 6.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