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양 권정생 1
-「강아지똥」과 『몽실언니』-

원  종  찬

 

  1.머리말
    2.초기 동화 세 편-「강아지똥」을 중심으로
    3.소년소설 삼부작-『몽실언니』를 중심으로
    4.권정생 문학의 본질-오가와미메이·오스카와일드·방정환과의 비교
    5.권정생 문학의 한계와 문제점-노신·현덕과의 비교
    6.맺음말

  1.머리말

  몰라서 그렇지 권정생(權正生) 님은 우스갯소리를 잘하는 편이다. 괜히 긴장을 하고 있던 상대는 졸지에 허를 찔리고 만다. 권정생 동화의 한 축으로 해학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그의 푸근한 성격을 능히 짐작할 수 있는데, 상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뭔가 어색하거나 주눅이 든 분위기를 당신이 먼저 풀어내려는 따뜻한 배려 때문에 보통은 그 앞에서 금세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러나 이런 편안함은 잠시일 뿐, 그와 떨어지는 순간엔 벌써 눈물이 핑 돌고, 돌아서서 그의살아가는 모습이 계속 어른거리기라도 할양이면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사무침과 허전함, 가슴 한 켠이 무너져 내리는 서글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번은 전교조 인천지부의 총무를 맡았던 노미화 선생에게 해직교사들 맛있는 거 사먹으라고 차곡차곡 모아둔 돈 십 만원을 부쳐준 적이 있었다. 당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데 십 만원이라는 큰돈을 준단 말인가. 아무리 해직 시절이라 하더라도 우리 해직교사 중 누구도 당신보다 힘들게 사는 형편은 아니었을 것이다. 반정부 집회를 마친 날 돼지갈비집으로 갔지 아마…. 나는 음식을 빨리 먹는 평소 습관을 억누르며 체하지 않으려고 갈비살을 꼭꼭 씹어서 맛있게 아주 맛있게 먹었더란다.
  '억장이 무너져 내린다!' 오래 전 인천의 공부 모임에서 권정생 동화에 대한 서평을 써내기로 했을 때 이렇게 한 마디만 써 놓고 입을 막은 적이 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독자들이감동을 하는 작품에 대한 해설은 부질없는 일이다. 더욱이 출판사들이 앞다투어 그의 동화를 찍어내고 있고, 그 가운데 어떤 것들은 최고의 판매 부수를 자랑할 정도로 오랫동안 독자의 사랑을받아 왔으며, 비평가들 또한 우리 시대 최고의 작가라고 평가하는 데에 큰 이의가 없는 듯한 마당에, 굳이 탐탁치 못한 글재주를 가지고 세상이 다 아는 소리를 지껄이면서 작가에게 헌사를 바친다는 것은 예가 아닐 뿐더러, 설사 은밀한 짝사랑의 표시라 할지라도 스스로 생각하기에 겸연쩍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언제 써도 쓸 거라면 이번에는 권정생론을 써 달라는 편집부의 요청을 받고는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지금 우리 아동문학은 그 가치 숨어 있거나 다른 눈으로 왜곡되어 전하는 것들을 찾아 움직이기에도 바쁘다는 그간의 시간 타령은 내심 핑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시대 변화의 급류를 타고 어쩔 줄 몰라하는 요즈음의 내 꼴이고 보면, 뱃머리에 칼 떨어진 자리를 표시했다고 해서 불안감이 없어질 리 만무하다.
  곰곰이 다시 생각해보니 자신이 없었던 거다. 내가 보기에 권정생은 기독교 사회주의자이자 반문명 자연주의자·평화주의자로서 작가이기보다 '속죄양'의 길을 기쁘게 걸어왔고, 따라서 그의 문학은 자신의 신념을 따라 하늘이 정해준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순교자의 문학'이라 함직하다. 문명개화인이 되려고 기를 쓰고 있는 나는, 그 앞에서 한없이 비겁하고 한없이 초라하고 한없이 왜소해지는 자신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얼치기 문명개화인들이 갈수록 설쳐대는데 '하느님의 눈물'이 마를 새 있을까. 어쩌면 이 글은 '악어의 눈물'일지도 모른다.

  2.초기 동화 세 편-「강아지똥」을 중심으로

권정생은 「강아지똥」(1969)이 월간 『기독교 교육』의 제1회 아동문학상 수상작으로, 「아기양의 그림자 딸랑이」(1971)가 매일신문 신춘문예의 입선작으로, 「무명저고리와 엄마」(1973)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의 당선작으로 뽑히면서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1974년 세종문화사에서 발행된 동화집 『강아지똥』의 머리말에는 다음과 같은 작가의 말이 씌어져 있다.
  거지가 글을 썼습니다. 전쟁마당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얻어먹기란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어찌나 배고프고 목말라 지쳐 버린 끝에, 참다못해 터뜨린 울음소리가 글이 되었으니 글다운 글이 못 됩니다.
  처음에 나는 이 글의 제목을 '거지와 성자(聖者)'라고 썼다가 좀 상투라고 느껴져 그만 두었지만, 권정생에 대해 그보다 적합한 표현은 없을 듯하다. 「강아지똥」은 작가로서 그의 첫 출발점이고, '강아지똥'은 바로 작가의 분신이다. 아이든 어른이든 권정생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의 대표작으로 소년소설 『몽실언니』와 함께 동화 「강아지똥」을 꼽는 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강아지똥」을 왜 그렇게 좋아할까. 동심을 다름 아닌 자연의 성질이라고 본다면, 천성적으로 자연주의자에 가까운 아이들에게 '강아지'와 '똥'은 똑같이 즐겁고 친근한 대상이다.

돌이네 흰둥이가 누고 간 똥입니다.
  흰둥이는 아직 어린 강아지였기 때문에 강아지똥이 되겠습니다.
  골목길 담 밑 구석자리였습니다. 바로 앞으로 소달구지 바퀴 자국이 나 있습니다.
  추운 겨울, 서리가 하얗게 내린 아침이어서 모락모락 오르던 김이 금방 식어 버렸습니다.   강아지똥은 오들오들 추워집니다. 참새 한 마리가 포르르 날아와 강아지똥 곁에 앉더니 주둥이로 콕! 쪼아 보고, 퉤퉤 침을 뱉고는,
   "똥 똥 똥…… 에그 더러워!"
  쫑알거리며 멀리 날아가 버립니다.
  "똥이라니? 그리고 더럽다니?"
  무척 속상합니다. 참새가 날아간 쪽을 보고 눈을 힘껏 흘겨 줍니다. 밉고 밉고 또 밉습니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이런 창피가 어디 있겠어요.
  강아지똥이 그렇게 잔뜩 화가 나서 있는데, 소달구지 바퀴 자국 한가운데 뒹굴고 있던 흙덩이가 바라보고 빙긋 웃습니다.(83-4면)

쉽고 간결한 문장, 아이 어루만지듯 가볍고 정겨운 붓질, 유치하지 않도록 생기와 해학을 담뿍 담아낸 문체, 대화 몇 마디로 뚜렷한 성격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일품의 솜씨 들이 위의 예문에서한눈에 들어온다. 도대체가 우리 작가들은 동화의 문법에 서투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일급 동 작가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면서, 당시로선 드물게도 동화의 형식에 깊은 철학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은, 특히 남보다 열악한 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를 생각할 때 혹시 버림받은존재가 아닌가 하는 소외감에 빠져들 때가 있다. 영원히 버림받은 존재, 곧 죽음은 삶에서 가장 큰 두려움이다. 이 작품은 그 두려움의 한 끝을 잡고서도, 두려움에 휘말리는 분위기가 아니라 자연 현상에 나타나는 대립의 쌍을 가까이 마주보게 하는 방식으로 사건 전개에 흥미를 주고 나름대로 내적 갈등을 이어간다. 버림받은 흙덩이가 자기 삶을 되돌아보는 가운데 총명하게 일깨우는 다음의 말은 이 작품의 중요한 전기(轉機)이다.

  "아니야, 하나님은 쓸데없는 물건은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어. 너도 꼭 무엇엔가 귀하게 쓰일 거야."(89면)

이렇게 해서 강아지똥은 자기 존재에 대한 실망에서 새 삶에 대한 갈망으로 자세를 바꾼다. 그리고 마침내 민들레 싹의 거름이 되어줌으로써 한 송이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난다. '똥'이 '꽃'이 되는 인식의 깨달음도 충격이지만, 이 과정을 무리 없이 아주 생생하게 형상화한 데에 이 작품의진정한 주제가 숨어 있다.  

"내가 거름이 되다니?
  "너의 몸뚱이를 고스란히 녹여 내 몸 속으로 들어와야 해. 그래서 예쁜 꽃을 피게 하는 것은 바로 네가 하는 거야."
  강아지똥은 가슴이 울렁거려 끝까지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 과연 나는 별이 될 수 있구나!)
  그러고는 벅차 오르는 기쁨에 그만 민들레 싹을 꼬옥 껴안아 버렸습니다.
  "내가 거름이 되어 별처럼 고운 꽃이 피어난다면, 온 몸을 녹여 네 살이 될께."
  비는 사흘 동안 계속 내렸습니다.
  강아지똥은 온 몸이 비에 맞아 자디잘게 부서졌습니다. 땅 속으로 모두 스며들어가 민들레의 뿌리로 모여들었습니다. 줄기를 타고 올라와 꽃봉오리를 맺었습니다.
  봄이 한창인 어느 날, 민들레는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웠습니다. 향긋한 내음이 바람을 타고 퍼져나갔습니다.
  방긋방긋 웃는 꽃송이엔 귀여운 강아지똥의 눈물겨운 사랑이 가득 어려 있었습니다.(94면)

정말 아름다운 동화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빛이 날 겨레 아동문학의 꽃이다. 더욱이 작가 스스로 '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 피워낸 꽃임에랴. 나는 이 아름다운 동화 한 편에도 한국 아동문학의 사회적 성격이 남김없이 드러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자기 존재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깨닫는 내용에서 더 나아가 사랑과 희생의 가치, 곧 아름다운 삶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이루어내는 것이라는 진실을 가르쳐 준다. 소외의 문제를 다룬 것 가운데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가 주로 심리적 위안을 전하는 작품인 것과 비교된다. 안데르센의 작품이 인간의 심리 특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권정생의 작품은 나름대로 사회성과 역사성을 포함하고 있다. 물론 권정생 동화의 사회성과 역사성은, 강아지똥이 완전히 녹아 민들레꽃이 되었듯이 작품에 완전히 녹아 있어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혹시 작가의 남다른 주제의식이 어린이 독자에게 심리적 부담이 되는 건 아닐까? 더 나중에 밝히겠지만 권정생 문학에는 그런 면 없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이 작품은 교훈을 강요하려는 동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부담을 느끼게 하지는 않는다. '똥'이란 소재가 지니는 해방감(정서적 배설 욕구)을 빼놓을 수 없거니와, 「미운 오리 새끼」처럼 자연의 섭리를 따라 존재의 가치가 드러나고 있으며, 작품의 진정한 주제 역시 자연의 섭리에 맞춰 형상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운 오리 새끼」와 비교되는 이 작품의 또 다른 중요한 일면이 있으니, 오리는 열등하고 백조는 우월하다는 식의, 존재 자체에서 비롯되는 차별이나 대립 관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지향이 그것이다. 권정생이 애써 찾는 작품의 소재나 주인공들은 버림받고 짓밟히고 희생되는 존재가 대부분이다. 작가는 눈에 보이는 현상 너머의 본질을 추구함으로써 궁극에는 자연의 섭리를 최고 질서로 삼는 대동세상을 꿈꾼다. 이런 작가의 꿈이 배태된 곳은 현상과 본질이 어긋나 있는 '모순된 현실'이다. 현실주의론의 맥락에서 권정생의 작품을 높이 평가해 온 저간의 사정은 여기에서 비롯한다.
  버림받은 존재가 쓸모 있는 존재로, 더러운 존재가 아름다운 존재로, 낮은 존재가 높은 존재로 거듭난다는 동화의 내용을 그대로 수난의 민족 현실과 직결해서 설명하려고 든다면 아마 비약이될 것이다. 작가의 창작 태도가 그러했듯이 동화의 장르 특성에 대한 충분하고도 올바른 이해를 전제로 하는 조심스런 해석의 태도가 요구되는데, 적어도 버림받고 짓밟히고 희생되는 존재를 주인공으로 삼은 권정생 동화에서 서민 지향의 작가적 태도 곧 민중성을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본다.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일 테지만, 권정생은 1937년 동경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배고픔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일본이 전쟁에서 패망한 뒤에 고국으로 건너왔으나 가난 때문에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6·25 동족상잔을 거치면서는 그나마 형제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분단의 희생양이 되었고,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는 가운데 부모를 여의었으며, 전신 결핵이라는 중병까지 걸린 상태에서 떠돌이 구걸 생활을 겪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고난 체험은 식민지와 분단시대를 잇는 수난의 역사 속에서 고통 받아온 민중의 비참한 운명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는 홀몸으로 1968년 안동 일직 교회의 문간방에 정착하여 병마와 싸우며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민들레꽃과 강아지똥은 그 시기에 같은 운명처럼 나의 가슴에 심어졌다."(「나의 동화 이야기」, 『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 종로서적, 1986. 154면)고 한다. 「강아지똥」이 비록 천진한 동심의 표현으로 씌어지긴 했어도, 그 뿌리는 강자에 짓밟혀온 우리 역사 현장의 한복판, 부당한 역사의 횡포에 시달려온 대다수 민중의 삶에 닿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강아지똥'은 작가의 분신인 동시에, 버림받고 짓밟히고 희생되는 삶을 살아 모든 가여운 존재의 상징이다. 이런 상징성 때문에 어른들도 이 동화를 읽고는 색다른 감동에 젖어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입선한 작품 「아기양의 그림자 딸랑이」에서도 작가의 한결같은 태도가 거듭 확인된다. 이 동화는 그림자를 주인공으로 하였다.

  어둡게만 살고 있습니다. 따라만 다니고 흉내만 냅니다. 하늘 높이 날아보지도 못합니다. 아무 데나 누워서만 지냅니다. 소리를 낼 수 없어 슬퍼도 울지 못합니다. 기뻐도 웃지 않고 벙어리인 채 살고 있습니다.(227)  

그림자 딸랑이는 아기양이 다른 양들과 싸우는 것을 보고 마음이 언짢아지는데, 인간의 세계에도 전쟁이 끊이질 않는 걸 알고는 몹시 슬퍼한다. 딸랑이는 미루나무 그림자를 만나고 시냇물을 만나면서 진실에 눈을 뜬다.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탐욕과 싸움이 없는 평화의 마음을 가질 때에만 물처럼 빛을 투명하게 통과시켜서 그림자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깨침이다. 이 작품은 「강아지똥」과 비슷한 전개 구조지만, 자신의 종교적인 신념을 더욱 짙게 반영하려고 한 탓인지 얼마간 작위성과 설교성이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탐욕과 싸움 같은 부정적인 대립자가 눈에 띄게 나타난다. 「아기양의 그림자 딸랑이」는 향후 권정생 문학의 주요 특질을 집약한 한 편의 철학 동화라 할 수 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동화인 「무명저고리와 엄마」는 3년 동안이나 긴 시간을 두고 한 줄 한 줄 적었던 작품이라고 한다. 과연 이 작품은 '가족사소설'에 해당함직한 대하 서사의 줄거리를한 문장 한 문장 고도로 압축하여 시적 형상으로 올올이 빚어낸 동화이다. 이 작품에는 가혹했 일제의 탄압과 수탈, 독립운동, 강제징용, 동족상잔, 월남참전 같은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들과거기 얽힌 한 비극적인 가족의 운명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이런 내용이다 보니 이 동화는 더욱 시의 모습을 닮았다. 간결하고 리듬감 넘치는 문장들이 반복과 병치의 구조에 담겨진 형식이다. 이 동화는 지아비와 일곱 자식들의 아픔을 껴안고 한 많은 일생을 살다간 '엄마'에 대해 '막돌이'가 표현하는 절실한 그리움의 언어이기도 하다. 결말 부분은 비극을 무지개빛 환상으로 처리하여 '엄마'의 슬픈 영혼을 하늘나라로 인도하려는 작가의 씻김굿이 되었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하여 작가가 형식에 대해 늘 탐구적인 자세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동화의 문법을 완전히 몸으로 익히고 있는 걸 알게 된다.
  아동문학으로서 이 작품의 충격은 역시 그 서사시적 화폭에 있다. 우리 근현대사의 가장 예민한 문제들을 고통받는 서민의 편에서 매우 정직하게 드러낸 거의 유례가 없는 '동화'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작품의 공감대가 모성의 절실한 표현에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모성이 사랑과 희생의대명사인 점에서는 이 작품도 이전 동화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작가 의도랄까 의식은 더한층 구체적인 사회 역사의 현장으로 나와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점이 나타난다. 역사적 사건들은 그것이 극적인 형태로 제시되지 않는 한, 그에 대한 바탕 지식이 없는 어린이 독자에게는 사뭇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될 것이란 점이다. 이 때문인지 첫 동화집을 낸 뒤에, 더 이상 '동화'를 붙잡고 있는 것이 무리한 것 같다면서 당분간 '소설'을 쓰기로 맘먹었다고 적은 자료가 눈에 띈다.(이현주 목사에게 보낸 1975년 3월 5일자 서신, 『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 232면.) 소년소설 『몽실언니』는 이렇게 해서 일찍부터 준비되고 있었던 것임이 확인된다. 권정생의 '동화'와 '소설'은 결코 혼동할 수 없는, 그러나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한 뿌리의 두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