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문학》

5년 만에 본 정생이 형  

권오삼
 

1989년 5월에 제가 《행복이 가득한 집》이라는 잡지에 '권정생의 〈무명저고리와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벌써 10년이 가까워 오니, 세월이란 놈은 임꺽정 이야기에 나오는 황천왕동이만큼이나 걸음이 무척 빠른 것 같습니다.
  금년 4월 4일 토요일에 저는 인천에 사는 동화작가 김구연 씨와 함께 안동에 갔다 온 적이 있습니다. 저로 봐선 부끄러움과 궁금증이 한데 범벅이 된 그런 걸음이었습니다.
  부끄럽다고 한 것은 거의 9년만에 형 집에-권정생 선생을 그냥 형이라 부르다보니 이 자리에서도 그냥 형이라 부르겠습니다. 그래야 제 부끄러움도 더 뚜렷하게 드러나 보일 테니까요-가게 되었다는 것이고, 또 얼굴은 한 5년만에 보게 되었다는 거지요.
  93년에 봉화 계시는 전우익 선생님께서 현암사에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산문집을 내셨는데, 안동문화회관에서 출판기념회가 있다고 하면서 형이 전화로
  "아재, 니도 시간 있으면 내려올래?" 하기에 그때 가서 얼굴은 본 적은 있지만 형 집에는 가지 못 했습니다. 여럿이 안동 시내에서 밤은 보냈는데 형도 같이 있었고 한 데다 이틑날은 일요이이었지만 그만 이현주 목사와 함께 청량이행 열차를 탈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형 집에 못 가 본 것은 거의 9년 되고ㅡ 얼굴 못 본 것은 한 5년은 되는 셈입니다. 그렇게 괸 것은 제가 하는 이도 없이 시간이 나지 않은 데다. 천성이 어디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은 탓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게으름으로 보면 아주 정확한 진단이 되겠습니다. 그렇지만 늘 관심은 있어 전화질은 자주 하는 편이었습니다. 어쩌튼 형이라 부르면서 9년만에 안동을 가게 되니 빈대도 낯짝이 있다고 제 마음에 어찌 부끄러움 맘이 깃들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자주 전화질을 하다 보면 상대방을 늘 마나고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되고, 그 바람에 가슴에 품었던 궁금증이나 그리움이란 것도 그만 슬며시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전화라는 게 참 못된 요물입니다.
  하여튼 미안함 때문에 형을 못 본 그 5년이 한 10년쯤으로 느껴지는 것을 부담으로 안고 갔지만 그보다는 형도 그간 얼마나 늙었을까 하는 궁금증과 호기심, 그리고 전화선을 통한 목소리의 만남이 아닌 얼굴을 본다는 것이 조금은 흥분되고 기뻐서 이내 가벼운 마음이 되었습니다.
  미리 통지는 하고 갔던 처라 형도 조금은 마음이 설레었으리라 봅니다. 덧붙여 김구연이란 친구와도 10년 훨씬 넘게 만나는 셈이었으니까요. 우리 두 사람은 밤늦게 안동에 도착했기에 역 근처 여관에서 전화로 도착을 알린 뒤 내일 아침 먹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이튿날 우리 안동 신시장 앞에서 갓상경한 시골 사람처럼 몇 번이나 묻고 확인한 끝에 조탑리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습니다. 버스에 오르자 곧장 맨 뒷자리로 쯔르르 가서 앉았습니다. 아침이라 승객들은 많이 않았지만 빈 자리도 얼른 눈에 띄지 않은지라 그렇게 앉아 한시름 덜었다 싶은 마음으로 숨을 돌리고 있는데, 버스 뒷문 손잡이 쪽에 웬 농사꾼 차림의 아저씨가 얼굴을 뒤로 돌리며 뭐라고 하는데 보니까, 아이쿠! 바로 정생이 형이었습니다.
  제가 버스에 오르면서 미처 정생이 형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런 우라질! 버스에 오르면서 정생이 형 얼굴도 못 보다니!' 저는 또 한 번 낭패를 당한 기분이었습니다. 정생이 형은 우리를 마중하러 조탑이에서 일찍 안동 시내로 나왔던 것인데, 우리가 어정쩡하게 두어 정거장을 지나쳐서 버스를 탔기에 형을 우리를 만나지 못했던 것이고, 저는 버스 속에 있던 형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저와 정생이 형은 5년만에 얼굴을 마주 대했습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머리가 하향게 세어 버린 것이고, 부엌 물건이 방으로 들어온 게 달랐습니다. 그런데 변하지 않은 게 하나 있었습니다. 한 달 생활비였습니다. 무슨 말 끝에 제가 "형은 한 달 생활비가 얼마 드노?" 하고 물었더니 주저하지도 않고 5만 원 정도라고 했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형이 자세리 꼽아 대는데 지금 기억도 없습니다. 원체 액수가 적은 것들이어서 기억이고 뭐고 할 건더기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지금 제 기억에 남는 건 오로지 5만 원이라 하니 들어도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몽실이' 작가가 말한 것이니 믿을 수밖에요.
  그리고 그렇게 살라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은 저처럼 고개가 갸우뚱해질 것인데, 요 다음에 어느 다음에 어느 분이 안동 가실 일이 있으면 그 때 좀 확실하게 조목조목 알아 드셨다가 다시 저한테 알려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야 다음에 누가 저보고 정생이 형에 대해서 묻는다면 제대로 답변을 할 수 있을 게 아닙니까?
  그런 형이 안동 시내로 가서 저녁을 먹자면서 데리고 간 곳이 '골부리 국' 집이었습니다. 5년 전에는 보지 못했던 음식점이었습니다. 맛있게 잘 먹고 나서 밥값을 치르려고 하닌 주인 말씀이 형을 가리키면서 "저 손님이 냈니더." 하는 겁니다. 제가 깜짝 놀라 " 그 돈은 위조지폐니 도로 둘려주이소." 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형 때문에 그만 스타일을 구겨 버렸습니다. 신사복으로 쪽 빼 입은 도시 사내 대신 머리가 하얗게 세고 차림새가 그렇고 그런 농사꾼 아저씨가 밥값을 치렀으니 음식점 주인이 속으로 뭐라 했겠는가 하는 겁니다.
  밖으로 나와서 제가 한 마디 했지요.
  "한 달 생활비가 5만 원인 사람이 저녁 값으로 오천 원을 써 버렸으니, 열흘 치 생활비 쓴 건 아냐." 그러면서 밥값을 주머니 속에 쑤셔 넣으려고 했지만 막무가내여서 관뒀습니다. 대신에 옆에있던 친구가 점잖게 내가 드리고 싶어서 그러니 받으시라고 하면서 형 주머니에 뭔가를 집어넣데요. 그래서 마음이 가벼워졌지요. 우린 낙동강 둑에서 벚꽃 구경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형을 더 이상 붙들 수도 없고 해서 버스 타는 곳까지만 같이 갔습니다.
  형이 차에 오르기 전에 제 어깨를 껴안더니 자기 뺨을 갖다 댔습니다. 뺨이 따스했습니다. 형 몸 속 애인처럼 붙어사는 미열 탓인지 아니면 따스한 정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따스한 뺨이었습니다.
  그렇게 형과 헤어지고 다시 우리 두 사람은 여관에서 잔 뒤 이튿날 안동을 떠났습니다. 5년만에그렇게 만나고 돌아오니 미안한 마음은 좀 가셨지만 그 대신 그보다 더 큰 미안한 마음이 제 마음속에 자리잡을 줄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전화통을 붙들고 "형 봐라. 형 집에 갔다가 우리 집에 오니 내가 형을 착취해 먹고 사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했습니다.
  말로는 환경 보호니 자원 절약이니 뭐니 하면서 온갖 잡동사니들을 구정물처럼 쏟아  보내며 사는 데 생활이 정생이 형 사는 모습과는 너무나 명암이 뚜렷해서입니다.(이 글은《어린이문학》 1999년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글쓴이 권오삼님은 시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