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문학》

전화로만 뵙는 분
   
변기자

 

'따르릉따르릉.'
  '여보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하나 물어 볼 게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그러다가 제가 경상도 사투리로 말하면 언제나
  '허허허허'
  하고 웃고 계십니다.
  '따르릉따르릉.'
  '여보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날이 따뜻해졌으니까 이제 들꽃들도 피지요? 저도 고향산천을 한 번 보고 싶습니다.'
  '그렇지요. 그렇겠죠.'
  그러고는 편지 속에 살짝 들꽃을 넣어 주시는 분, 권정생 선생님.

제가 처음으로 권정생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은 5년 전 일입니다. 일본의 어느 잡지사에서 '아시아의 아동문학' 특집호를 만드는데 한국의 아동문학 작품 한 편을 소개해 달라는 의뢰가 왔습니다. 그럴 때 한 유학생이 소개해 준 게 「강아지똥」이었습니다. 과연 이런 글을 쓰시는 분은 어떤 분일까? 저는 작가에 대한 상상을 하면서 「강아지똥」을 번역했습니다.
  잡지가 나온 후 출판사에서 보낸 책을 보신 권정생 선생님께서 저한테 「몽실언니」를 보내 주셨습니다. 포장을 뜯고 그 자리에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저의 양볼은 눈물로 젖고 있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몽실언니」를 읽어 가는 제 마음속엔 '이 책을 일본어로 번역해야지. 이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지. 한국전쟁은 이렇다는 것을…….' 하는 생각이 점점 커졌습니다.
  전쟁은 죄 없는 사람을 한없이 죽이고 평범한 가정을 파괴시키고 서민의 자그마한 행복을 빼앗을 뿐더러, 한민족 한겨레 사이에 일어난 싸움이라면 그 이상의 비극이 없다는 것이 「몽실언니」에 낱낱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저는 몽실이와 같은 세대입니다. 그래서 한국전쟁 시기를 알고 있으며, 커서 배운 지식으로도 알기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몽실언니」를 읽으면서 지식이 아닌 실감으로, 마치 제 자신이 빗발치듯 날아오는 폭탄 속을 헤매는 피난민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부모 없이 사는 몽실이 모습을 통하여 한국전쟁을 여태껏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고, 몽실이의 숨결마저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역사 교과서도, 학자 논문도 할 수 없는 '문학의 힘'이라고 느꼈습니다.
  제가 「몽실언니」 일어판을 내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감동과 전쟁의 사실을 우리 재일동포는 물론이고 일본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한국전쟁 때 재일동포들 모두는 조국 상황을 염려하고 하루 빨리 전쟁이 끝날 것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연합군이 세계에서 세 번째 원자폭탄을 우리 나라에 떨어뜨리려고 했을 때 다같이 반대하고 나섰으며, 일본에서 많은 동포들이 서명과 모금을 하여 국제기관인 '평화옹호 세계대회 위원회'에 우리의 의사를 전했습니다. 여기에는 어른들뿐만 아니라 고등학생도, 중학생도 참가했습니다.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그 당시 고물장사(철 장사라고도 한다. 헌쇠, 동, 진유등 금속을 사서 도매상에 팔고 이익을 얻는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어느 동포 아저씨는 일본인 도매상에 파는 헌쇠가 공장에서 탄알이 되어, 내 나라 내 형제 위에 떨어진다고 생각하니 아무리 먹고사는 길이라고 해도, 더 이상은 고물장사를 할 수가 없다며 그만두셨답니다.
  1950년대, 그 때는 일본에 사는 우리 동포들의 생활은 아주 곤란했습니다. 그런 형편 속에서 고물장사는 적은 밑천으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만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한 나머지 그것마저 그만두신 아저씨도 계셨던 것입니다.
  저희 집에서는 아버지가 우리 나라 지도를 가리키면서 아침저녁으로 초등학생인 저한테
  '인민군이 여까지 내려왔다.'
  '국군이 여까지 올라갔다.'
  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자들에 대한 아버지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생생합니다.
  한국전쟁을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우리 동포, 일본 사람 할 것 없이 누구나 다 전쟁을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전쟁이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기 위해, 그리고 일본의 전후 경제 복구가 이웃 나라, 즉 우리 나라 사람들의 죽음과 슬픔 위에 있었다는 것을 모두가 똑똑히 인식하게 하기 위해, 여기 일본에서 「몽실언니」를 소개할 필요가 있고, 또 나아가서는 우리 나라 분단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일본에도 있다는 것을 다들 알아야지요. 어른, 어린이 할 것 없이…….
  또 하나 「몽실언니」에서 중요한 것은 조국통일을 원하시는 권정생 선생님의 뜨거운 마음이 마디마디에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 「몽실언니」가 잡지에 연재된 것이 1981년이라고 하니 자유롭게 말도 못하던 정치 하에서, 인민군을 등장시켜 '남북이 서로 원수가 아니다' 라는 장면을 내세웠으니 이게 얼마나 용기가 있는 일입니까!
  이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권정생 선생님께서는 큰 용기가 필요하셨고, 우리는 그런 용기 있는 작품을 기다렸던 것이 아닐까요? 병 때문에 남보다 무거운 짐을 들 수도 없고, 남보다 빨리 걷지도 못하실 거라 생각한 권정생 선생님이 누구보다도 훨씬 무거운 짐을 들고, 누구보다도 훨씬 앞장서서 걸어가시는 것만 같습니다.
  선생님의 굳센 마음과 자애로운 마음이 「몽실언니」 속에 은은한 은빛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역경 속에서도 남을 시샘하지 않고 남을 믿고 사랑하고 성실하게 힘껏 사는 몽실이의 모습에서 우리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도리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이런 몽실이를 두고 어느 일본인 독자가 말했습니다. '민족이 겪은 고통을 어린 한 몸에 지고서도 마음씨가 곱고 다정하고 부지런한 몽실이는 그야말로 당신네들 '민족의 자화상' 같다.'고.
  이 외에도 독자들의 감상이 출판사와 저희 집에 많이 와 있습니다만,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단숨에 읽었다'는 형이고, 또 하나는 '읽고 또 읽고 다시 읽는다'는 형입니다. 이 두 유형은 형태는 달라도 둘 다 「몽실언니」의 매력에 사로잡힌 것이지요. 그렇죠! 그리고 이구동성으로 '아주 감동적이었다', '바로 이웃 나라에서 있었던 일인데 일본인 우리들은 많은 것을 너무너무 모르고 지내왔다', '몽실이는 어쩌면 그렇게까지 깨끗하게 살 수 있었나!' 등등.
  어느 동포 집에서는 젊은 아빠와 엄마가 딸(6세)에게 읽어 주었는데, 아빠도 울고 엄마도 울고 딸도 울었답니다. 초등학생인 딸은 '몽실이도 불쌍하고, 아버지도 불쌍하고, 다 불쌍하다.'고…….
  이 어린 독자가 권 선생님의 인물 묘사를 이토록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니……. 이것이 바로 권정생 선생님 작품의 힘이고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권정생 선생님의 작품을, 저는 일본의 '어린이 독서의 해'인 올해에 계속해서 두 권이나 내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5월에 「몽실언니」를, 9월에 「강아지똥」을 출판하게 된 것입니다. 「몽실언니」가 출판되고 얼마 안 있어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이산가족문제가 논의되었는데, 이것과 관련하여 「몽실언니」가 신문에 소개되는 등 크게 화제가 되었습니다.
  「몽실언니」를 통하여 한국인 작가, 권정생을 알게 된 독자들이 연이어 나온 책 「강아지똥」 작가로서 다시 만나게 되어 권정생 선생님 작품의 깊이와 작품 속에 일관하여 흐르는 만물에 대한 사랑에 경탄하는 등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몽실언니」를 '민족의 자화상'이라고 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강아지똥」을 '어린이들의 철학'이라고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권정생 선생님의 작품이 평가를 받으면 받을수록 저는 반가운 반면에, 이렇게 평가받는 권정생 선생님의 명작 번역자로서 과연 제 자신이 적임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무서워집니다. 그런데 그런 저의 고민과 불안이 한꺼번에 날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건 독자들이 보내 준 감상문을 읽을 때입니다. 요즘 제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은 「강아지똥」을 읽은 어린이들 사이에 '아이고' 소리가 유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고, 더럽다! 아이고, 기쁘다! 아이고, 맛있다! 등등, 말머리에 '아이고'를 붙여서 말이죠. 저는 번역할 때도 그렇거니와 일본말로 제 글을 쓸 때도 꼭 한마디는 우리 말을 넣으려고 합니다. '어머니', '고마워요', '예쁘다' 등등. 그것이 「강아지똥」에서는 '아이고'였습니다. 그랬더니 어린 독자들이 '난 한국말 하나 배웠다!' 하면서 이집 저집에서 '아이고, 아이고' 소리가 연발하고 있다니 마음이 따스해집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 동포 어린이들도 말 하나 배우고, 일본 어린이들도 말 하나 배워 서로서로 가까운 사이가 되어 그야말로 '길벗어린이'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정승각 선생님이 그린 「강아지똥」엔 독특한 우리 나라 맛이 난다며 모두가 칭찬합니다. 특히 강아지똥이 비에 맞아 자디잘게 부서지고 민들레 줄기를 타고 올라가는 두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었다고 합니다. 이 두 장면을 그리는 데 매우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독자들이 그 그림을 보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참 좋아!' 라고 할 땐 저도 기쁩니다.
  이번 권정생 선생님 작품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실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단 한 분만을 뵙지 못하였습니다. 권정생 선생님 한 분을 분단 때문에…….
  그러나 꼭 오겠지요. 남의 몽실이, 북의 몽실이, 일본에도 있을지 모르는 몽실이가 모두 다같이 만나는 날이. 제가 권정생 선생님을 만나는 날이.
  그 날이 먼 날이 되는가, 가까운 날이 되는가는 우리의 노력에 달려 있겠지요. 그 날까지는 전화로만 뵙겠지요, 권정생 선생님을.

  2000. 10. 10  일본 도쿄에서

(이 글은《어린이 문학》2000년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글쓴이 변기자 님은 재일동포 2세로서 「몽실언니」와 「강아지똥」을 일본말로 옮겼으며, 동경 나카노 구립중앙도서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