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름다움을 꿈꾸는 〈나사렛 아이〉

홍경남


  《강아지 똥》을 처음 본 놀라움이 채 가라앉지 않았을 때 동화집 《사과나무밭 달님》을 만났다. 〈똬리골 댁 할머니〉〈별똥별〉〈해룡이〉같이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가 가득했다. 가끔 내가 만난 아이들한테 이 책을 사 주거나 빌려 주기도 했다. 이 동화집의 마지막 이야기〈나사렛 아이〉는 아이들이 읽기에 아마도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글쓴이의 사람에 대한 꿈이 깊이 간직되는 아름다운 글로 오래 남았다.
  〈나사렛 아이〉는 한 편의 시다. 스스로 일하고 생각하고 깨달으며 끊임없이 자라는 아이를 그린, 사람의 아름다움을 꿈꾸는 시.

  아가 귀에 들렸던 양의 울음소리. 아가 눈에 보였던 작은 별들의 빛. 아가 코에 스며들던 짐승들의 똥오줌 냄새. 아가 몸에는 그것들이 물감처럼 진하게 배어 버렸다. 가슴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가 둥지를 짜고 도사리고 있었다. 아가는 까마득히 잊어버렸지만 아가 가슴속에 심겨진 그 날 밤 베들레헴의 애틋한 빛깔들은 영 사라지지 않았다. (191쪽)

  요셉은 다시 작업방에 들어가 만들다 둔 침구 모서리에 굵은 쇠못을 두들겨 박기 시작했다. 땅! 땅! 울리는 쇠망치 소리에 아이는 가슴이 뛰었다.
  "예수는 누구의 아들?"
  조금 아까 마리아가 묻던 말이 어디엔가 숨어 있다가 망치 소리에 깨어 나와 귀를 울렸다. 그와 함께 이상하게 젖은 모습을 짓던 마리아의 얼굴이 떠올랐다(195쪽)

  마리아가 신의 계시로 아기를 갖게 되었다는 성서의 이야기에 대해 작가는 '그렇다'거나 '아니다'고 뚜렷이 말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목수 요셉'이라고 대답하는 아이의 말에 모르게 눈물짓는 것으로 미루어 자랑스럽게 태어난 것은 아니라고 짐작할 뿐이다. 이 이야기에 줄거리는 보이지 않는다. 가난한 목수와 결혼하기 전에 아기를 가진 마리아가 낳은 아이 예수는 보리떡으로 배고픔을 이기며 세 아기를 기르는 어머니 마리아를 도와 물을 길어 나르고 낫으로 베어 쓰러지는 풀의 생명을 안타까워하고, 가난과 병으로 죽어 가는 고멜 아주머니에게 제 몫의 보리떡을 갖다 주는 예사롭지 않은 아이다.
  아이들이 포도원 주인을 돌로 쳐죽이고 임금이 포도원을 빼앗는 놀이에서 포도원 주인 노릇을 맡은 나봇에게 돌을 던지자, 예수는 나봇을 일으키고 대신 돌을 맞는다. 제 몸으로 폭력을 당해내면서 폭력에 저항한다. 예수와 비슷한 저항은 간디의 방식에도 보인다.

  어진 백성을 죽이고 포도밭을 빼앗았던 임금, 그런 임금은 메시아가 될 수 없다. 그러니까 메시아는 임금이 되어서는 안 된다.(210쪽)

  놀이 장면 마지막에 그렇게 썼다. 그러나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은 그것을 언제 알게 될까? 영원히 모를 사람들도 많다. 오히려 자기 폭력을 합리화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싸움은 영원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일 수도 있다. 현실에서 이긴다고 결코 이기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현실의 승리 쪽으로 기운다. 현실의 승리에 붙잡히지 않은 싸움이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예수는 랍비들과 함께 성서를 읽으며 공부하고 그 공부한 이야기를 아버지 요셉에게 들려준다.   메시야에 대해서 요셉은 '씩씩하고 용감한 구세주'를 바라지만 예수는 '가난과 병고를 지고 채찍으로 맞으면서 고난을 당하신다'고 생각한다.
  예수와 비슷한 처지의 에스더가 있다. 가난 때문에 에스더는 예루살렘으로 팔려가고 어머니 고멜은 결국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에스더의 의붓 아버지 호세아는 이 세상에서 남남이 없다면서 에스더를 찾아 나선다.
  성서에 나타나는 다니엘, 수산나, 호세아 따위의 이름이 이야기에 나타나는데 호세아나 다니엘, 에스더는 구약성서 한 편을 차지하는 제목이기도 하다. 에스더가 누구인지 혹시 이 이야기와 관계된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옆 선생님의 성서를 찾아보았다. 개신교에서 쓰는 성서는 번역의 문제도 있고, 봉건사상에다 권위주의에 찌든 말투가 답답하기 그지없다. 기독교인들은 다 무엇하나? 이런 성서도 바꾸지 못 하면서 어떻게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공동번역 성서는 그런대로 읽을 만했다.
  에스더는 바빌론의 포로로 끌려간 모르드개가 딸처럼 기르는 처녀다. 유대왕국이 신바빌로니아에 멸망하여 반세기 동안 붙잡혀 있던 이른바 '바빌론 유수'말이다. 그 뒤 페르시아가 다시 신바빌로니아를 멸하여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는다. 페르시아 왕 아하수에로가 와스디 왕비를 폐위하고 에스더를 새 왕비로 맞는다. 에스더가 왕비가 되는 잔칫날 에스더의 부모와 같은 모르드개는 두 사람이 왕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을 알고 에스더에게 알려 왕을 구한 일이 있다. 그런데 아말렉 사람 하만은 모르드개를 비롯한 유대인 모두를 잡아죽이려는 계획을 세운다. 하만의 음모를 알게된 에스더는 용기를 내어 왕한테 지금까지 비밀로 했던 지가의 출신, 즉 자기가 유대인임을 밝히며 유대민족을 살려줄 것을 요구한다. 페르시아 왕은 자기 목숨을 구한 적이 있는 모르드개에 대한 보답을 하지 않은 것을 깨닫고 상을 내리고, 하만은 자신이 모르드개를 죽이려 했던 방법으로 죽음을 당한다. 그리고 하만의 민족 아말렉 사람들도 많이 죽음을 당한다. 다만 유대인은 노략질은 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는 여러 민족 사이의 다툼이 있었음은 짐작할 만하다. 더구나 아말렉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광야를 지나며 머물던 곳에서 자주 공격했던 민족으로 유대인들과 숙적이 되었다고 한다. 성서 '에스더'편의 내용으로 보면 에스더가 왕비가 되었기에 민족의 살육을 면할 수 있었지만 자신들을 죽이려 했던 이민족을 대신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썩 좋은 이야기로 읽히지 않는다. 권정생 선생님은 다른 민족에 끌려가 고통받는 삶에 더 이끌렸을 것이다. 그래서 의붓아버지와 살다가 팔려 가는 아이로 그려진 것이 아닌가 싶다.
선생님의 시와 동화에 자주 나타나는 소가 이 이야기에도 나온다. 요셉이 목수일을 가르치는 장면이다. 요셉은 아들에게 '만드는 솜씨보다 정성을 가르쳤다'고 되어 있다. 일하는 마음 바탕을 소중히 여긴 것이다. 요셉은 소의 멍에를 만드는 일이 목수일 중에서 가장 어렵다고 한다. 소의 어깨가 아프지 않도록 마음을 쓰면서도 튼튼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평생 소는 그 멍에를 멘 채 늙어가고, 그 다음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이다. 슬픈 삶 같았지만 오히려 장한 삶이었다. 채찍으로 맞아가며 밭을 갈면서도 아무런 말이 없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길에도 순하기만 했다(215쪽)

  그리고 소의 한평생과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억울한 죄수의 이야기가 겹쳐 나타난다. 메시아의 암시다.

"내가 소라면 마지막 도살장에까지 멍에를 메고 가겠어요. 그 고달픈 멍에와 함께 죽어버린다면 모든 소들이 무거운 멍에에서 자유로워질 거예요"(218쪽)

  나사렛 아이는 태어나며 들은 양의 울음소리, 짐승들의 똥오줌 냄새, 밤마다 떨어지는 별의 눈물을 가슴에 받아 모으며 멍에를 메고 불타 사라질 꿈을 안고 자란다.
  이렇게 무거운 이야기라니…….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너무나 무거운 이야기다. 이것을 어떻게 감당하는가? 그래서 '나사렛 아이'는 편안과 풍요를 추구하는 세상에서는 성공할 수 없는 동화다. 그러나 진정을 추구하는 작은 사람들, 그런 아이에게는 다가갈 수 있다.
  깨달음은 외로움과 슬픔을 가져온다고 하던가? 깨닫지 못한 나는 그것을 알 길이 없다. 〈나사렛 아이〉를 본 내 마음에 그대로 남는 것은 바닥에 닿지 않는 슬픔과 외로움이었다. 그래도 이야기는 성서에서 우리가 흔히 읽어 내지 못하는 아름다움의 가치, 고통을 선택하는 사람의 꿈, 둘레 사람들의 괴로움과 함께 하고 나와 남을 나누지 않는 사람에게도 닥치는 외로움을 보게 한다. 역시 권정생 선생님의 모습이 보인다.▣(《우리 말과 삶을 가꾸는 글쓰기》제 62호, 20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