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속 배나무 씨 꺼냅니다
《깜둥바가지 아줌마》·권정생· 우리교육·1998년 초판


권영희 

얼마 전에 이 책을 읽고 4학년 열세 명하고 공부한 적이 있다. 미리 책을 주고 한 달 남짓 숙제를 해오게 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두 시간 좀 못 되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도 시간에 쫓겨 여간 아쉬운 게 아니었는데 지금은 더하다. 책을 다시 보니 이것 저것 파묻힌 얘깃거리가 감자 캘 때와 같다. 5학년이나 6학년이었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맛있게 먹어 줄 나이가 따로 있다. 무리한 걸 집어삼키게 한 것이 부끄럽고 미안하다.
 《깜둥바가지 아줌마》는 1974년에 낸 《강아지똥》과 1990년에 낸 《할매하고 손잡고》에 실린 동화들 가운데 초등학교 고학년들이 읽기에 알맞은 것을 골라서 다시 엮은 것이다. 편의상 주제나 작품이 비슷한 것끼리 묶어 보았다.
   첫째, 작가 권정생의 말대로 <강아지똥>처럼 초기작 <깜둥바가지 아줌아>, <떠내려간 흙먼지 아이들>은 ‘버려지고 숨겨진 목숨을 찾아 그것들을 이야기로 썼던’ 작품들이다.
   둘째, 《몽실 언니》와 궤를 같이 하는 <할매하고 손잡고>가 있다. 할매 ‘놈이’가 처녀 적에 인민군 총각 ‘망이’를 만나 낳은 아이 ‘목이’는 휴전선에 철조망이 쳐진 뒤로 아비없는 자식이 되었다. ‘빨갱이의 새끼’로 손가락질 받는 설움이 죄를 부르고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살인자가 되어 또 똑같은 아들 하나 두고 목이는 어머니 곁을 영원히 떠나버렸다. 놈이의 남편도, 아들도 그렇게 세상이 빼앗아 갔다. 그러나 손주 ‘용이’만큼은 빼앗기고 싶지 않다. 그래서 아비 목이처럼 나쁘게 되기 전에 보여 주고 싶다. 할배 만나서 ‘할배 망이가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다.’ 그래야 그전처럼 ‘빨갱이 새끼’가 안 될 것이다. 놈이는 그래서 밤마다 꿈속에라도 달려간다. 마침내 휴전선 철조망을 지키던 젊은 군인이 길을 내어주었다. 그러나 그 때 미군이 나타난다. 할매는 갑자기 나타난 미군의 총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용이마저 총탄에 주저앉는다. 할매 꿈속의 일이었으나 읽는 이에게는 현실이다. 그러나 할매는 오늘 밤은 절대 되돌아오지 않으리라고 벼르며 또 북녘 할배를 만나러 간다. <할매하고 손잡고>는 《초가집이 있던 마을》과 《점득이네》를 통해서도 보여준 분단의 아픔과 통일을 주제로 한 사실주의 작품이다. 분단상황과 통일을 주제로 하기는 <토끼나라>도 마찬가지이다. 동물을 의인화하여 쓴 것만 다를 뿐이다.
   <어느 주검들이 한 이야기>에서도 주인공은 전쟁고아이다. <아기 양의 그림자 딸랑이> 역시 민족의 비극인 전쟁 이야기를 곁자락에 두고 있다.
   <쌀도둑>과 <금복이네 자두나무>도 사실주의 동화이다. <쌀도둑>은 일제 때를 배경으로 한다. 배곯는 어린 쌀 도둑을 눈감아 준 정미소 일꾼은 힘없는 백성의 설움을 알았기에 나라를 되찾는 데 젊음을 바친다. 해방이 되어도 그 사람들 소식은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국회의원 선거는 치러지고, 마을 길을 넓혀 표를 얻고 싶은 권력가는 기어이 <금복이네 자두나무>를 뭉개어 버렸다. 평생 종노릇하고도 한 마지기 뙈기밭조차 건지지 못한 금복이네 가난은 부자의 욕심 때문이었다. 욕심을 채운 부자는 더 부자가 되겠지,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해지는 건 그래서다.
  마지막으로 <어시장 이야기>와 <사슴>은 위의 두 묶음과는 작풍도 주제도 다르다. 기독교 정신이 짙게 배인 관념성 짙은 동화라는 것이 우선 그렇다. 주제를 굳이 말로 그러모으자면 ‘하나님만이 아는 운명을 제 몫으로 껴안는 것, 그리고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 그리하여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으로서의 아름다운 영혼을 얻는 것’이 태어나 사는 모든 삶의 궁극 목표라는 것이다.
   편의상 나누어 본 것이기는 하지만 동화를 이렇게 세 묶음으로 가닥 지우고 나니 이제사 드는 생각이 있다. 따지고 보면 이 이야기들이  다 통하는데 왜 이렇게 쓸데없는 짓을 했을까.
놈이 할매는 <토끼나라> 의 순이 토끼다. 할매가 손자 용이 손잡고 넘으려는 휴전선, 그러나 할매에게는 ‘배나무 씨’가 없다. 기다리는 것은 ‘사자’나라 군인, 미군이었다. 할매는 미군의 총에 용이까지 잃을 뻔하였다. 비록 꿈이었지만, 철조망을 걷는 일은 현실로도 5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도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사자 나라, 곰 나라, 너구리 나라…… 그들 틈에 남북이 갈라져 여태 총부리를 겨누고 있지 않은가.
   토끼나라는 어떻게 사자와 곰들을 물리쳤을까. 두 임금이 한 임금이 되고 마침내 한 나라가 되어 행복한 옛날로 돌아가도록 사자 나라와 곰 나라는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을까. 그렇게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할머니의 배나무 씨는 어디 있을까. 누가 가지고 있을까. 사자와 곰의 서슬 퍼런 칼날을 녹여버릴 ‘나긋한 꽃향기’, 입고 있던 사자 나라, 곰 나라 군대의 옷을 벗어 던지고 창을 버리고 한 몸이 되어 부둥켜안게 할 하얀 꽃향기는 대체 어디서 누가 만들까.  

“아니오. 지금이나 옛날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저 쪽이나 이 쪽이나 같은 곳이오.” (<할매하고 손잡고>, 67쪽)

할매 가슴에나 묻어둔 배나무 씨를 이제는 이렇게 말할 때가 되었다. 모두들 가슴 속 배나무 씨 꺼내어 이제는 말할 때가 되었다. 말하면 그나마도 빼앗겨 버릴까봐 때를 기다려 서로 조바심만 쳤으니.

할배를 만나러 갑니다. 꼭 만나러 갑니다.(<할매하고 손잡고>, 69쪽)

꼭 만나야 하기에 더는 미루지 말아야지, 지치지 않고 가면 만날 것이다. 뜨거운 피 그 씨에 흩뿌릴 수 있는 마음으로.
   서로를 미워하고 전쟁놀음이나 하던 때가 아이들 장난 같은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아기 양의 그림자 딸랑이>처럼 지금쯤 “모두들 왜 미워할까? 싸우지 않을 수는 없을까?”(191쪽)하고 안타까이 흐느껴 울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진정한 평화는 없는 것일까.

“그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진짜 봄이 와서 착한 생각만 가질 때, 싸움이 없어지고 미움이 가시어지고, 욕심을 떨어버리는 그 때가 와야 하는 거야. 그 때는 모두 발가숭이가 되어 화안한 해님이 어디에나 막힌 곳이 없이 곱게 비추면 우리도 깜둥이 옷을 벗고 예쁜 빛깔을 받아 가질 수 있단다.”(<아기 양의 그림자 딸랑이>, 190쪽)

미루나무는 그림자가 더 이상 깜둥이가 되지 않을 그 날이 그렇게 온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어렵다.
   그러나 깜둥바가지는 어떤가. 부뚜막의 그을음에 찌들어 까맣게 된 천덕꾸러기 바가지는 상 위에도 못 오를 신세지만 제 할 일과 처지를 달게 받아들인다. 운명을 탓하기는커녕 남보다 못한 신세에도 오히려 남을 걱정하고 함께 나누려 한다. 그래서 해님처럼 인자한 얼굴을 가져보고 싶었던 깜둥바가지는 “……그러니까 어느 한쪽이 참아야 하지 않겠니? 쬐그만 할 때는 누구라도 다 장난꾸러기인 거야. 그걸 탓하지 말고 사랑해 주면 언젠가는 스스로 깨닫게 된단다…….”(41쪽) 조롱에도 꿋꿋하고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을 끝으로 깜둥바가지 아줌마는 부엌을 떠나 개울물에 던져졌다. 강물 따라 흐르면서 바가지가 생각하는 건 가장 잰 체하던 사기접시였다. 먼저 깨져 내버려졌던 사기 접시한테서 바가지는 연민을 느낀다. 하늘의 별 같은 귀엽던 눈동자만을 생각한다. 미움은 피어날 여지가 없다. 평화는 그렇게 온다. ‘버려지고 숨겨진 목숨’에서, ‘강아지똥’에서, ‘깜둥바가지 아줌마’한테서, ‘배나무 씨’에서, ‘마지막 한 방울의 피’에서.
   순이 토끼와 돌이 토끼의 죽음은 고귀하다. 배나무 씨를 뿌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죽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죽음이다. 이름없는 죽음이다. <어느 주검들이 한 이야기>에도 한 목숨이 죽어간다. 전쟁고아의 가엽고 쓸쓸한 최후이지만 그의 눈과 귀가 보고 듣고 외다리가 견디어 온 세월은 성스럽기까지 하다. 그는 어린아이의 눈으로 죽어가는 것들, 그것이 설사 독사라 하더라도 마음 아파하였고, 어딘지도 모르고 무작정 가기만 하는 사람들이 오늘도 오늘만 생각하며 땅만 내려다보고 걷는 것을 보며 서글퍼 하였다. 그래서 그에겐 ‘죽는 것이 두려우면서, 죽기 위해 땅만 보고 걷는 바보들로 땅 위는 어디에나 구슬픈 빗소리 같’다. 그는 자연의 소리를 좋아한다. 아늑한 어머니 품 속 같은 세상이 거기에는 있다. 싸늘하지 않고 거만하지 않다. 권위도, 위선도, 아첨도, 비굴함도 없다. ‘조금도 흐리지 않는 맑은 어머니의 음성’ 어쩌면 그가 보고 듣고 싶었던 세상은 그런 세상이었을 것이다. 살아가려고 악물고는, 한참이나 한참이나 기도하던 손. 어쩌면 그의 기도는 어머니 품 속 같은 세상을 향한 기도였는지 모른다. 외다리로 버티기에는 너무 힘든 세상을 그가 용서했다면 아마 그런 까닭에서였을 것이다. 그는 돌아갔다.

“……보이지 않는 영혼에다가 조기는 조기 모양의 옷을 입히고, 명태는 명태 모양의 옷을 입혀서 말야. 이제 우리는 겉치레한 옷을 벗고 본래의 모양대로 고향으로 돌아간단다.”(<어시장 이야기>, 116쪽)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오면 착하고 정직한 이들을 가려 내어 데려다 주시’(<사슴>, 85쪽)기에 절룩거리면서도 살아가려고 애쓰다가, 이제는 거지의 옷을, 고아의 옷을, 외다리의 몸뚱이를 모두 벗어버리고 절대 누구를 미워하지도, 미련 두지도 않은 채 떠날 것이다. ‘고향’으로 갈 것이다. 어머니 품 속 같은 평화로 잦아들 것이다. 그는 임무를 다하였다. 거추장스러운 몸뚱이를 전부 아낌없이 제대로 썼으므로, ‘저절로 영혼이 꽃처럼 곱게 피어날 것이다.’(<어시장 이야기>, 116쪽)
   그래도 <쌀도둑>의 선재, 웅재가 그리 되는 것은 마음이 아프다. 누나 명희까지 셋은 어찌 살까. 그들 남매 곁을 지켜주리라 기대했건만 ‘모두 평등하게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청년들은 만세 운동으로 그들 곁을 떠났다. 어린 아이 셋이, 이제는 거지가 되어야 하나. 그러다가 차가운 길바닥에 쓰러져 죽어도……?
   도대체 모두 평등하게 잘 사는 세상은 언제 누가 만드는 것일까. 금복이네는 어찌하나. 금복이네도 거지가 될 것 같다. 최주사 같은 사람이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다음에는 금복이 아버지가 헤어날 길이 없다. 더 많은 금복이 아버지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러나 또 한번만 희망을 갖자. 그렇게 떠밀려 온 흙먼지들은 어느새 ‘서로 떠받들고 뭉쳐’(<떠내려간 흙먼지 아이들>, 129쪽) 강이 끝나는 어디메쯤 넓은 땅 덩어리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새로 섬이 되어 솟구치지 않을까. 그리하여 흙먼지들이 긴 세월 흘러 온 눈물을 말끔히 씻을 날, 그 고운 흙 위에는 다시 싸움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는 더욱 정답게 어울려, 새로운 고향을 아름답게 가꿔 갈 것을 소근소근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떠내려간 흙먼지 아이들>, 130쪽)

그런 날, 그런 날은 정말 올까.
나도 모르겠는 그 날을 나는 4학년하고 참 신나게 떠들었다. 내가 뭐라고 떠들었을까.▣
( 이 글은 《동화읽는어른》2001년 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권영희 회원은 어린이문학연구 분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