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강아지똥보다 무엇이 더 나은 존재인가?


조두리

 

우리 사람들이 강아지똥보다 더 하찮게 여기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본다. 길가 모퉁이에 자라나는 잡초는 그래도 생명이 있다 하여 더 낫게 여기고, 하물며 쓰레기조차 이제는 분리수거다 재활용이다 하여 자원으로 거두어진다. 그런데 강아지똥은 하찮게 여기다 못해 더러운 것이라 누구나 인상 한 번 찌푸리고 피해 가는 존재다. 그런 강아지똥에 생명을 불어넣고 가치를 담아 대우를 해 준 작가의 마음은 얼마나 깊고 높은 것일까?
  처음 이 동화를 읽은 건 길벗어린이에서 나온 그림동화였다. 여기저기에서 추천하는 책 가운데 가장 먼저 이름이 올라있었기 때문에 선뜻 마음이 갔던 것 같다. 퉁퉁 부어 심술 가득한 강아지똥의 얼굴은 떼쓰며 보챌 때의 내 아이 얼굴 같았고, 환성을 지르며 민들레를 꽈악 껴안는 모습에서 내 가슴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그리고 《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종로서적)에 실린 원본을 읽으면서 또 다른 감동으로 다가왔다. 종교를 가지지 않은 나는 종교인들의 글을 왠지 피하게 된다. 세상 모든 만사가 하느님으로 결론지어지고 부처님으로 도달되는 것이 싫어서다. 마치 인간이 하느님이나 부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도구인 것 같이 느껴지고 자신의 삶을 책임지지 못하고 떠넘기는 것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권정생 선생님 역시 신실한 종교인이고 강아지똥도 그 영역 안에서 창작된 동화이다. 그런데 이 동화와 권정생 선생님의 삶을 읽으며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고 엄숙한 마음으로 한 줄 한 줄 가슴에 새겼다.
  7쪽도 채 안 되는 이 짧은 동화 속에서 작가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러면서도 단호한 힘의 소리로 계속 내게 물어왔다. “너는 강아지똥보다 무엇이 더 나은 존재인가?” 과연, 나는 강아지똥보다 무엇이 더 나은 존재인가? 강아지똥처럼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고 싶어 열망하기보다 누군가 나에게 무엇이 되어주기를 바랐던 적이 견줄 수 없이 더 많았고, 강아지똥처럼 온 몸을 산산이 부숴 새로운 의미를 탄생시키는 것에 용기를 내지도 못하는 나는 어엿하게 이름 석자를 걸고 있다.

‘돌이네 흰둥이가 누고 간 똥입니다. 흰둥이는 아직 어린 강아지였기 때문에 강아지똥이 되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거듭 읽을 때마다 가장 인상적인 구절이다. 이름도 없는 그냥 강아지똥! 작가는 이렇게 시작부터 나에게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네 이름 석자에 앞서 사람이라는 이름에서부터 출발하라고!”▣
  (이 글은 《동화읽는어른》2001년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조두리 회원은 독서지도 분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