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책
센 바람 속에 펄럭이는 깃발처럼
센 바람 속에 펄럭이는 깃발처럼
원종찬
《목수, 화가에게 말 걸다》
최병수 말하고 김진송 글 지음 | 현문서가 | 2006년
누구나 살아온 날들에서 어떤 굴곡과 매듭이 지어지는 순간들이 있다. 과거에 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살고 있을 줄 알았을까? 그 때 그 순간의 선택은 옳았을까? 필연이었을까? 나로 하여금 이 길을 걷도록 만든 힘은 무엇일까? 최병수가 말하고 김진송이 글을 지은 《목수, 화가에게 말 걸다》를 읽다보면 이런 생각들이 저절로 떠오른다.
최병수는 누구인가? 아마 ‘최병수’라는 이름을 잘 모르는 사람도 그가 만든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 〈노동해방도〉 〈장산곶 매〉 정도는 쉽게 기억할 수 있으리라. 그의 작품은 한 시대의 상징이었다. 그의 그림은 화랑이 아니라 열사의 장례식, 집회와 시위현장에 바쳐졌다. 그 앞에서 우리는 이름과 얼굴을 몰라도 모두 동지였다.
그 때의 많은 동지들은 이후 각자의 길을 찾아 흩어져갔다. 그리 멀리가지 않았다면 최병수의 이후 작품들 역시 시대를 가로지르는 상징적인 깃발로 펄럭이고 있음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지구환경과 반전평화로 초점을 이동했고, 변함없이 거리의 화가로서 집회와 시위현장을 누비고 다닌다.
최병수는 화가라기보다 행동주의 설치미술가라 하는 편이 얼른 이해하기 쉽다. ‘리우+10 세계정상회의’ 행사장 앞에 얼음을 조각해서 설치한 〈펭귄이 녹고 있다〉, 베트남 평화공원에 세운 〈생명 솟대〉, 이라크 해방광장에 내걸은 〈야만의 둥지〉, 미군의 무차별 공습의 희생자가 된 어린소녀를 그린 〈너의 몸이 꽃이 되어〉, 새만금 갯벌에 세운 수십 개의 장승과 솟대들, 그리고 평택 대추리 들판에 경운기를 들어 올려 만든 솟대……. 그의 활동무대는 지구촌 곳곳으로 확장되었고, 이제 그의 작품과 이름은 국내보다 해외에 더욱 많이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최병수에 관한 기록이다. 그가 좌충우돌하면서 세상에 대해 눈을 뜨고 하루아침에 ‘화가’가 된 이야기, 그리고 그 이후에 사회운동, 미술운동, 지구환경운동을 하면서 겪고 느낀 것을 최병수 특유의 입담으로 풀어놓았다. 대담을 이끈 김진송은, “한 개인의 출신과 배경 그리고 품성이 최병수처럼 그대로 사회적 관계 속에 복잡하게 엮여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말한다. 40대 활동가의 삶에 관한 기록이 세상에 나온 이유를 요약해주는 말이다.
나는 이 책을 읽자마자 어린이도서연구회 회원들과 나누고 싶었고, 청소년들에게 권장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최병수는 초등학교 졸업장밖에 없는 미술 분야의 무학자(無學者)다. 그가 세계적인 환경미술가가 되기까지는 곡절이 참 많았다. 그는 신문배달부를 비롯해서, 중국집 배달부, 전기공, 웨이터, 보일러공, 공사장 잡역부, 선반공, 목수 등 온갖 직종을 전전하다가 어느 날 뜻하지 않게 화가가 되었다.
그가 ‘화가’라는 직함을 가지게 된 사연이 흥미롭다. 그는 어린이 책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김환영과 초등학교 동창인데, 80년대에 어쩌다보니 김환영을 비롯한 민중미술 운동가들과 작업실에서 숙식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최병수는 벽화를 그리기 위한 발판 만들어주는 일을 거들어주다 졸지에 경찰서에 붙들려간다. 그는 벽화 〈상생도〉를 그릴 때 철조망에 진달래만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는 어째서 개나리는 없느냐고 했고, 그러니까 화가들이 그럼 당신이 개나리도 그려 넣어 봐라 해서 잠깐 붓을 든 것이 전부였다. 경찰서에서 실랑이를 하던 중에 그의 구속 요건을 고민하던 형사는 그의 직업을 ‘화가’로 써넣었다. 이후 그는 진짜 화가가 되었다. 그 일 때문에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최병수를 ‘관제화가’라 불렀다. “나를 화가로 만든 건 경찰이야. 난 정부가 인증한 공식화가라고.” 최병수 또한 껄껄 웃을 수밖에.
김진송이 밝히고 있듯이 그는 지적으로 세련되게 말하거나 논리를 다루는 데 능숙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이 책은 아주 쉽게 읽히지만 다 읽는 데에는 시간이 꽤 걸릴 수도 있다. 중간 중간에 끼어들어간 수많은 작품사진들을 감상하느라고 그런 것만은 아니다. 책을 읽다보면 어느 틈에 과거로 돌아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수업을 땡땡이치고 놀러 다니던 일, 등록금을 못 내서 선생님한테 혼나고 뒤돌아서던 일, 돈벌어오겠다고 가출했으나 배고픔을 못 이겨 남의 가게 물건에 손댄 일……. 가난 때문에 미운 오리새끼처럼 지내야 했던 성장기의 아픈 기억은 6, 70년대에 어린 시절을 거친 이들에겐 어느 정도 공통의 기억이 아닐까. 80년대의 집회와 시위현장, 그리고 조직 활동에 관한 기억을 떠올릴 때는 젊은 패기와 열정만이 아니라 운동권의 어두운 면도 따라붙는다.
최병수가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어도 이 책이 위인의 반열에 오른 인물의 전기(傳記)나 회고록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노동자이자 운동가다. 로프를 둘러메고 건물과 가로수를 오르며, 엔진 톱을 들고 얼음과 나무를 깎아대고, 가면을 집어쓰고 거리로 나서며, 포크레인을 타고 하늘에 매달린다. 전기나 회고록은 자기연민과 합리화에 의해 재구성된 과거의 미화이기 쉽다. 그러나 이 책은 현재진행형인 우리들의 이야기고, 우리 시대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이 최병수의 육성에 바탕을 둔 ‘솔직함’을 기본관점으로 했다지만 어디까지나 최병수의 관점인 것을 지나쳐서도 안 될 것이다.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는 듯 최병수와 거리두기가 곳곳에 드러나고 있는 것은 대담을 이끈 김진송의 공력이다. 김진송은 극히 짧은 질문이나 독백체의 서술을 이따금 보일 뿐인데도 차분하고 세심하게 대담의 어떤 균형을 만들어간다. 최병수가 진술한 날것 그대로의 기록이지만 김진송의 인간과 시대에 대한 통찰력에 힙 입어 경험과 사유의 종합을 이뤄낸 것이다. 김진송은 국문학과 미술사를 공부했고 문화연구를 하면서 《현대성의 형성―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현실문화연구)는 책을 썼다. 지금은 목수가 되어 있으니 어느 면으로는 최병수와 반대의 자리로 이동해온 셈이다.
김진송은 최병수의 작품이 분명하고 단호한 호소력을 지닌 것은 미술의 언어와 문법을 간단히 틀어쥔 결과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친구를 아끼는 마음에서 면박 주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최병수는 역마살이 낀 듯 늘 이곳저곳 돌아다녔고 한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런데 반전평화단원으로 이라크에 갔을 때 피를 쏟고 난 뒤로 위암 판정을 받아 대수술을 받기에 이르렀으니 여간 걱정이 아닌 것이다. 김진송은 본인 스스로 활동을 다그치게 하는 최병수의 분노를 이해하면서도 우려한다.
나는 최병수가 요양도 할 겸 강화도에 자리를 잡았을 때 그의 거처에 몇 번 들러본 적이 있다. 그가 사는 곳은 문 안팎을 막론하고 철공소나 고물상처럼 어지럽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연장과 재료가 포함된 그들 잡동사니의 반 이상이 작품들이다. ‘꿩 먹고 알 먹으면 멸종한다.’고 써 붙인 기둥이 먼저 눈에 띈다. 수도꼭지에 끼워진 전구, 깨진 항아리 속에 들어앉은 부처, 수북이 쌓아놓은 대못들 위에 누운 예수, 완성되었거나 작업 중인 솟대들……. 그 하나하나가 보여주는 발상의 기발함과 충격적인 메시지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상상력은 화살처럼 일직선으로 주제를 향해 날아가 박힌다. 그와 함께 이라크에 반전평화단으로 다녀온 동화작가 박기범이 대학로와 광화문에서 평화를 위한 단식을 하거나 몇몇 단체가 연합해 문화공연을 펼쳤을 때 어린이도서연구회의 많은 이들도 함께 했다. 당시 이라크 전쟁을 주제로 한 최병수의 걸개그림 〈야만의 둥지〉와 〈너의 몸이 꽃이 되어〉를 본 사람들은 그 강렬한 이미지에 사로잡힌 경험을 떠올릴 수 있으리라. 최병수 작품은 상징과 은유의 옷을 입고서 핵심을 정면으로 겨누고 있기에, 누구나 보는 순간 쉽고 빠르고 정확한 이해에 도달한다.
그의 작품들은 예외 없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이슈를 핵심으로 삼아왔다. 그런데 폭격으로 처참하게 헤진 어린소녀의 몸을 흩날리는 꽃잎으로 수놓은 것에서 보듯, 서정적으로 승화된 이미지들도 적지 않다. 나는 거대한 고래가 동물들을 싣고 지구를 벗어나는 대형걸개그림 〈우리들은 당신을 떠난다〉를 볼 때마다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낀다. 노아의 방주를 떠올려주는 이 그림에는 인간이 없다. 인간의 흔적은 고래의 배에 꽂힌 굵은 작살뿐이다. 검은 우주공간에 떠 있는 고래의 모습에서 인간과 더불어 살 수 없어 지구를 떠나는 동물들의 절망감이 배어난다.
최병수는 강화도에서 요양을 하는 중에도 쉴 새 없이 여기저기 투쟁의 현장에 달려갔다. 그러다가 교통사고까지 당했다. 혼자 사는 탓에 몸이 가벼워서 더 그런가보다 싶으면서도 그의 천성이 어디 눌러앉을 위인은 못되는 것 같다. 그는 들판을 질주하는 바람처럼 살아왔다. 이런 그가 지금은 여수에 머무르고 있다. 그의 말로 ‘정착’이라고 했으니, 새로운 ‘이후’를 고민하면서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보려 함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번에 책을 낸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는 〈성장과 야만〉 시리즈의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구상중인 〈컨베이어 벨트〉란 작품을 끝내고 좀 멀리 보면서 사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이를테면 어린이 환경캠프 같은 것을 생각한다.
“지금 아이들 교육은 완전히 로봇 교육이잖아. 아이들하고 텐트도 만들고 집도 짓고 그림도 그리고 그런 캠프를 열고 싶어.”
여기서 출판사 편집자도 모르는 비밀 하나. 김기정 장편동화 《해를 삼킨 아이들》의 판화그림 한 컷은 최병수 작품이다. 그가 위장을 삼분의 이나 잘라낸 직후 가평에 사는 김환영의 뒤채에서 간병할 무렵, 마감 시간에 쫓기는 친구의 일을 그 성질에 모른 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상생도〉에 개나리꽃을 그려 넣은 것으로 화가가 되었던 것처럼, 그는 이렇게 해서 어린이 책에 슬쩍 데뷔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원종찬 님은 우리 회 자문위원이다.